1. '제주4.3의 진실' 대자보 부착에 함께해 주세요 트루스포럼은 4.3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제주4.3의 진실' 대자보를 전국 대학 캠퍼스 및 주요 게시판에 부착할 예정입니다. 함께 하실 대학생 및 국민 여러분께서는 아래 링크에 등록해 주세요!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2. 제주4.3 특강을 진행합니다. 역사무기화 전략은 좌파의 오래된 전략입니다. 좌파는 4.3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안타까운 희생을 볼모 삼아 진실을 왜곡하고 이를 무기로 사용해 왔습니다. 트루스포럼은 4월 3일을 맞아 제주4.3 특강을 진행합니다. 제목 : 제주4.3 역사무기화전략의 실태 강사 : 김은구 (트루스포럼 대표) 일시 : 2023년 4월 3일(월), 오후 7시 장소 : 트루스포럼 서울대 센터 - 참가비는 없습니다. 저녁식사는 제공되지 않습니다. - 오시는 길은 아래 지도를 참고해 주세요. -------- 아래는 '제주4.3의 진실' 대자보의 텍스트 버전입니다. 제주4.3, 진실에 기반한 진정한 화해와 상생을 간절히 바랍니다. 제주4.3은 6.25 전쟁의 전초전이었습니다. 제주4.3과 여순14연대 반란을 막지 못했다면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좌파는 4.3의 안타까운 희생을 이용해서 이를 민중항쟁으로 왜곡하고, 못 다 이룬 그들만의 사회주의 혁명을 애달파하며 대한민국에 도전해 왔습니다. 4.3은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기 위해 자행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입니다. 한 달쯤 뒤 예정된 대한민국의 첫 번째 선거인 5.10선거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었고, 제주에서는 총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결렬됩니다. 그런데 좌파는 이것을 민중항쟁으로 미화하고 있습니다. 4.3폭동이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는 사실은 남로당지령서, 인민유격대 보고서, 이덕구의 선전포고문 등을 통해 명확히 확인됩니다. 당시 제주에는 '스탈린 만세', '김일성 만세'를 외치는 포스터가 붙었고, 폭도들은 소련 국가와 적기가를 불렀습니다. 4.3폭동을 주도한 김달삼은 김일성의 북한을 지지하는 지하선거를 주민들에게 강제했고, 5만여명의 투표지를 가지고 북한으로 갔습니다. 김달삼의 뒤를 이은 이덕구는 대한민국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이는 명백히 대한민국에 대한 반란이었습니다. 이들은 6.25가 발발하자 인민군지원환영회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반란으로 발전해 버린 4.3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의 안타까운 희생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게릴라전의 특성상 주민들과 인민유격대를 구별하기 어려웠고, 무고한 많은 희생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4.3의 희생은 그저 안타까운 희생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4.3폭동을 평정했기 때문에, 또 여순14연대반란을 평정했기 때문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합니다. 귀신 잡는 해병대는 폭동이 진압된 제주에서 훈련을 받고 파견되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4.3의 희생은 대한민국을 건국해 낸 구국의 희생입니다.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기념하고, 안타까운 희생은 반드시 보상하고 기려야 합니다. 또한, 모든 죽음은 안타까운 것입니다. 공산주의라는 거짓에 빠져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고 항적한 사람들의 죽음도 애석한 일입니다. 한 마을, 한 가족 안에서도 비극이 있었습니다. 살기 위해 폭도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했다가 희생된 분들도 있고, 거짓 증언으로 희생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이고 함께 품어야 할 아픔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항적한 사람들을 국가가 희생자로 기리고 보상할 수는 없습니다.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존립과 정체성의 뿌리에 관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제주4.3평화공원에는 대한민국에 항적한 무수한 폭도들이 희생자로 둔갑해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까지 죽인 사람도, 옆마을 사람 수십명을 죽창으로 찔러 죽인 사람도, 심지어 북한에서 파견된 간첩까지도 희생자로 둔갑해 있습니다. 부모님을 죽인 폭도의 이름이 부모님의 존함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분도 계십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까요? 모든 출발은 노무현 정권에서 작성된 4.3정부보고서가 좌익민족주의 사관으로 점철된 왜곡된 보고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대한민국을 친일파가 미국에 빌붙어 세운 부정한 나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나라로 보면서 결국 민족적 정당성을 북한에 부여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사, 3.1절 기념사 등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것이라는 편향된 인식을 서슴없이 드러냈습니다. 정부보고서는 박원순, 강만길, 김삼웅 등 좌파인사들이 주도했고 반대의견은 묵살됐습니다. 11만평에 이르는 4.3평화공원의 주요시설과 전시물은 군경의 학살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조성되었고, 폭도들의 살상을 증언하는 전시물은 단 두어 평에 불과합니다. 4.3정부보고서도 군경의 진압활동은 확대 왜곡하면서도 인민해방군의 만행은 축소하고 있습니다. 600여 페이지 넘는 두꺼운 4.3정부보고서에서 인민해방군의 살상행위 기록은 단 4페이지 뿐입니다.(도민보고서.p.104)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제는 정부보고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모욕으로 규정하고 처벌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역사무기화 전략은 사회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이용해 온 전략입니다. 마르크스주의적인 계급투쟁과 민중항쟁으로 역사를 재단하고 왜곡해서 무기로 삼는 것입니다. 거짓도 전략적으로 이용하고, 자료 왜곡도 서슴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결코 친일파가 미국에 빌붙어 세운 부정한 나라, 불의가 득세하고 기회주의자가 판치는 나라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성장은 기적이고 축복입니다. 대한민국은 시작부터 공산주의라는 거짓된 사회주의 이념과 싸워 이겨 생존했습니다. 진실과 거짓의 전쟁은 대한민국의 숙명이고, 이 싸움을 이기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적어도 북한이 해방되기 전까지는, 이 역사의 전쟁이 계속됨을 이해하고 함께 대응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 역사의 전쟁에 함께 대응해 나아가실 분들은 아래 이메일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공산 폭도들의 만행과 과잉진압에 희생된 모든 분들을 추모하며, 진실에 기반한 진정한 화해와 상생을 간절히 바랍니다. 2023.4.3. 트루스포럼 truthforum.kr@gmail.com ---- '우리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쏘련군과 그의 천재적 령도자 쓰딸린 대원수 만세! - 4.3폭동 1대 사령관 김달삼, 해주인민대표자대회 연설문 중 - 김달삼은 대한민국을 건국하기 위한 5.10선거를 방해하고 북한을 위한 지하선거를 강행했습니다. 그리고 5만여명의 투표지를 가지고 월북하여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주석단에 선출됩니다. 현재 북한 평양 애국열사릉에 그의 묘비가 있습니다.
우리는 제주4·3사건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 제주4·3사건의 본질과 현안을 중심으로 - 김 영 중 변질된 본질은 규명해야 하고 왜곡된 진상은 바로 잡아야 한다 머 리 말 75년 전인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유사 이래 4·3이라는 참혹한 사건이 발발했다. 이를 두고 대한민국 건국세력인 우파는 남로당중앙당과 전남도당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제주도당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고 북한 김일성 정권의 노선에 따라 공산통일을 위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9년간 지속된 폭동과 반란을 진압하면서 군·경 및 무고한 도민 다수가 희생되었다고 보고 있다. 반면에 북한이나 좌파에서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대한 민중이 봉기한 인민항쟁이요 통일운동이라고 주장한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 국민은 국가 미래를 보거나 국민통합을 위하여 대립하는 양쪽 의견이 접점을 찾아 건국사를 정립하고 화해 상생하여 미래로 나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갈 길은 멀고도 험하다. 또 우파의 시각을 더 보태면 김대중·노무현 정권이후 문재인 정권에 이르러 행정, 국회, 사법, 사회, 문화계에서 전방위적 4·3史 왜곡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더하여 4·3의 전국화 세계화 미래화를 추진 중이고 당시 남로당이나 북한의 주장과 똑 같이 조국통일을 위한 민중항쟁으로 둔갑시키고 있다고 우려한다. 이념논쟁 집어치우라는 고함과 위협에 4·3의 원인과 원인제공자인 남로당이나 공비는 사라지고 화해와 상생이라는 거창한 구호 아래 그들의 만행도 함께 사라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심각한 역사 왜곡이고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필자는 이러한 양측이 대립하는 주장과 논거들이 충돌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정말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고 이를 바로 알리는 일이야말로 4·3을 경험한 마지막 세대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해서 4·3의 성격부터 진행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아본 후 현재 무엇이 현안인지 말해보고자 한다. 이는 이 기회를 통하여 4·3의 역사적 진실을 알림과 함께 진심으로 제주의 아픔을 서로 이해하고 진정한 화해와 상생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점을 밝힌다. ⊙ 제주 4·3의 과거 – 4·3 주체와 성격 규정 ⊙ 1. 제주4·3사건을 일으킨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남조선노동당(약칭 남로당)이다. 남로당은 스탈린과 소련군 제25군 연해주군관구 정치사령관 스티코프의 지령을 받고 1946년 11월 23일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백남운의 남조선신민당 3당이 합당하여 남로당으로 통합한 정당이다. 제주도에는 조선공산당제주도당만 있었고 인민당이나 신민당은 하부조직이 없었다. 따라서 중앙에서 남로당으로 통합된 이후에도 공산당제주도당은 종전 이름 그대로 계속 활동하다가, 1947년 3·1운동기념투쟁을 앞둔 2월 12일이 되어서야 애월면에서 비밀리에 회합하여 당명과 간판을 남로당제주도당으로 바꿔 달았다. 그러하니 4·3을 일으킨 주체는 이름이 남로당제주도당일뿐 사실상 공산당제주도당이라고 규정해도 전혀 틀리지 않는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도 CNN과의 대담에서 제주4·3은 ‘공산당의 폭동으로 일어났다’고 전 세계에 천명했다. 그리고 북한에서 1946년 8월 28일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합쳐 북조선노동당(북로당)으로 출범하자 남한에서도 이에 발을 맞춰 3개월 후 3당을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통합하였으며 당명도 북한을 추종하여 노동당이라 명명한 것이다. 2. 남로당제주도당 당원은 몇 명인가? 당시 제주도 내 이념지형과 분위기를 알 수 있는 남로당 당원 자료는 다음과 같다. 가. 제민일보4·3취재반이 낸 『4·3은 말한다』에 의하면 남로당원은 1947년 3·1기념투쟁 당시 1,000~3,000명, 1948년 4·3 발발 당시 5,000~6,000명, 그해 초여름 경에는 족히 30,000명이나 되었다. 나. 남로당제주도당 인민해방군 사령관 김달삼(본명 이승진)은 1948년 8월 2일 제주를 탈출할 때 북한정권수립지원투쟁의 일환으로 시행한 52,350명의 지하선거 투표지를 가지고 월북하였다. 다. 1946년 10월 29일 제주도에서 선출된 과도입법의원에 당선된 좌파 문도배와 김시탁은 12월 12일 개원식에 불참하고 13일 서울 민전회관에 나타나 기자회견에서 제주도 30만 동포는 끝까지 민전 밑에서 더욱 단결할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 제주도 내는 인민위원회가 거의 8할의 인구를 통일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라. 당시 남로당제주도당은 스스로 5만 당원이라고 선전하였다. 마. 미군정은 제주도민 70%가량이 남로당에 호의적이라고 분석했다. 바. 1948년 5월 22일부터 6월 30일까지 40일간 군·경과 각 정보기관 그리고 포로 5천여 명을 심문 조사한 ‘브라운 대령의 제주도활동보고서’에 의하면, ‘세포조직이 제주도의 모든 마을과 도시에 조성되었다. 이들 세포조직은 한 명의 지도자, 선동 전문가, 그리고 보급 전문가, 그리고 큰 도시에는 현존하는 정부의 붕괴 시 시민행정 기능을 담당할 요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촌락에 조직된 공산주의자 세포조직 이외에 제주도를 위한 인민민주주의 군대가 구성되었다. 이 군대는 2개 연대와 보충 전투대대로 구성되어 있다. 장교요원들이 임명되었고 신병모집이 활발하다. 폭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인민민주주의 군대 약 4,000명의 장교와 사병을 보유한 것으로 추산된다. ... 6명 정도의 훈련된 선동가와 조직가들이 파견되었고 공산주의와 그 목적에 대하여 얼마간 이해를 하는 500~700명 정도의 동조자들이 파견된 6명의 특수 조직책들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주민 60,000~70,000여 명이 남로당에 실제 가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참여한 사람들 중 대부분은 남로당의 배경과 목적에 대한 이해가 없으며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참여의사가 없다는 것이 매우 분명하다. ... 무지한 교육받지 못한 농부들과 어부들이며, 그들은 남로당이 그들에게 제시한 보다 나은 경제적인 보장에 쉽사리 설득 당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보는 이에 따라 그 숫자에 차이는 있겠지만 남로당이 전도적으로 각계각층에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고 여기서 핵심 주동자는 4·3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3. 남로당은 무슨 목적으로 4·3사건을 일으켰는가? 그것은 바로 공산통일을 목적으로 했다. 남로당 강령 제2호를 보면 그 목적이 ‘조선에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북한의 공식 명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의 민주주의는 바로 ‘공산주의’를 말한다. 따라서 제주4·3은 남로당이 대한민국 건국을 파탄 내고 소련과 북한 노선에 따라 공산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 단행한 폭동이고 반란이다. DJ 정권 때 국정원장과 통일부장관을 역임한 임동원의 『혁명전쟁과 대공전략』이론을 빌리면 제주도4·3반란은 남로당이 군중을 선전 선동하여(부자 가난 없는 좋은 세상 건설) 군중을 동원하고(3·1기념투쟁) 군중을 조직하며(민전, 민청, 전평, 부녀동맹, 교원조합 등) 점차 무장하여(인민해방군 조직) 게릴라전을 전개하고(4·3사건, 선전포고, 제주도적화음모사건〈일명 11·7사건 또는 경찰프락치사건〉) 6·25남침전쟁과 같은 정규전과 연결하여(인민군지원환영회) 종국에는 공산통일을 위한 혁명전쟁의 일환이라 하겠다. 흔히 좌파 지식인들은 제주4·3사건을 ‘완전한 통일을 위한 투쟁’이라고 미화하고 정당화하지만 공산주의 최고 보루인 소련의 붕괴와 북한의 현실을 보고도 남로당의 ‘통일투쟁론’을 지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며 틀렸다. 남로당의 통일투쟁의 최종 목표는 북한노선에 따른 공산화통일만의 통일인 것이다. 그래서 좌파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통일운동이냐?’를 추궁하면 좌파는 침묵하고 답변을 회피한다.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감춘 전형적 용어혼란전술이다. 이에 맞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로 건국한 대한민국의 선택은 옳았고 정당하며 세계인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나라가 되었다. 분단 후 70여년 만에 남북한 간 국력의 차이는 엄청나다. 남북한 사람들의 신체적 조건이나 지능에는 전혀 차이가 없음에도 왜 이런 격차가 벌어졌는가. 그 원인은 오직 체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해방되면서 우리는 자유와 생명의 길을 택했고 북한은 독재와 암흑의 길을 택한 결과이다. 혹자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24일 뒤인 9월 9일 북한 정권이 출범하였으니 우리가 먼저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분단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조금만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북한이 1946년 2월 8일 사실상의 단독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나 1947년 2월 20일 확실한 단독정부인 ‘북조선인민회의’와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출범하여 우리보다 먼저 단독정권을 수립한 사실이다. 그리고 북한은 우리의 5·10제헌의원선거 전인 1947년 11월 18일 임시헌법기초위원 설치, 12월 20일 헌법초안을 채택해 우리의 제헌절차보다 훨씬 앞섰다. 그런데 1948년 1월 14일 스티코프가 레베데프에게 ‘당분간 북한에서 헌법시행을 보류한다. 신헌법에 의한 선거는 남한보다 늦은 시기에 실시하라’고 명령하였다. 남북분단 책임을 남한에 전가하려는 스탈린의 노회한 정치술수를 북한이 충실히 따라서 9월 9일 정권을 출범시킨 것이다. 이런 내막을 알아야 한다. 1947년 제28회 3·1절기념투쟁 때부터 스탈린·김일성을 명예의장에 추대하고 만세를 불렀으며 4·3을 주동하다 일본으로 도피한 김봉현·김민주의 책 『제주도인민들이 4·3무장투쟁사』 에는 4·3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위한 투쟁’이라고 3회나 명기했다는 사실을 보면 남로당의 의도와 목표는 공산화통일임을 부정할 수 없다. ※ 뒤에 첨부된 ‘제주4·3사건이 폭동·반란인 이유’ 참조 4. 4·3사건은 언제 시작하여 언제 끝났는가? 1948년 4월 3일 발발하여 1957년 4월 2일 마지막 공비 오원권을 송당리 경 토굴에서 체포하고 카빈총 1정과 실탄 14발을 압수함으로써 만 9년 만에 완전히 종식되었다. 그러나 4·3사건의 기간을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개방일까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1947년 3월 1일을 4·3의 기점이라고 하는 주장에는 3·1발포사건이라는 돌발적사건을 빌미로 민중항쟁론을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3·1발포사건’이 4·3의 시작이라면, 지금 시행하는 4·3희생자 추념일도 4월 3일이 아니라 3월 1일로 바꿔야 하고 추념일 명칭도 3·1 및 4·3희생자추념일이라고 바꿔야 맞다. 또한 4·3사건의 終期를 1954년 9월 21일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맞지 않다. 한라산 개방일 이후 토벌작전 중 경찰관 4명이 전사했기 때문이다. 그 중 맨 나중에 전사한 자는 1956년 9월 30일 경사 최형선 순경 홍하의 2명이니 4·3완전 종식 6개월 전 일이다. 이처럼 남로당은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에도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가슴에 손을 얹고 냉정히 생각해 보자. 브라운 대령 보고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4·3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4,000명의 장교와 사병으로 편성된 2개 연대와 보충전투대대로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고 건국된 이후에도 정부기관과 마을을 8년 이상 무장 공격하여 인명살상과 재산피해를 입힌 행위는 항쟁인가? 반란인가? 5. 4·3사건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과연 몇 명인가? 4·3정부보고서에는 25,000~30,000명이고, 그 당시 남로당이나 지금 북한은 시종일관 30,000명을 주장한다. 이 3만 명 설은 거의 정설이 되어 있으며 문재인 대통령도 70주년 4·3 추념사에서 ‘3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했다. 김일성이 남파한 거물간첩 성시백이 창간한 좌익신문 조선중앙일보 1949년 6월 28일자에 4·3피해자가 3만 명이라고 보도한 이후 북한도 1950년 1월 이승엽이 『근로자』 제1호에 3만 명, 그해 7월 이기석이 『인민』 제7호에 3만 명이라 기록했다. 1949년 9월 15일 스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고한 문서에도 ‘남조선 정부의 공식발표는 15,000명이 살해되었다고 밝히고 있으나 북조선 당국의 자료는 일반주민과 빨치산을 합해 30,000명이 살해당했다’고 했는데 북한은 지금도 3만 명이라 주장한다. 물론 국내 좌파들도 3만 명을 정설로 굳혀가고 있는데 너무 과장되었다. 2022년 3월 14일 제28차 제주4·3위원회에서 희생자로 확정된 자는 사망자 10,446명, 행불자 3,642명, 후유장애자 196명, 수형인 293명 등 모두 14,577명이다. 4·19 직후부터 제7차 신고(2023.1.1.~6.30 제8차 신고접수 중)까지 60년 넘게 조사하고 신고를 접수해 확정한 숫자다. 그러나 신고 결정된 자 중에는 4·3과 무관한 사망자, 자연사한 자, 월북한 자, 일본 도피자 등이 적지 않게 보이고 물론 4·3주동자도 많이 있다. 여기서 무고한 다수 희생자에 대해서 부정하거나 보상 또는 명예회복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6. 4·3사건은 남로당제주도당 단독 결행인가? 공산당의 ‘철의 규율’상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5·10선거가 가시화되고 자신들 입지가 궁색해진 남로당은 2월 7일을 기해 판을 바꾸려고 폭동지령을 하달하였다. 1948년 2·7폭동지령의 배경에는 스티코프가 1월 21일 레베데프에게 전화로 민전에게 (비합법 폭력투쟁으로) ‘전환’하는 계획을 준비하라는 지시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남로당제주도당은 그 연장선상에서 모든 준비를 완료한 뒤 최적의 D-day를 결정한 것이 4월 3일이다. 이날은 레닌이 10년 망명생활 중 러시아 2월혁명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러시아에 도착한 기념일이다. 상급당 지령 근거들을 보면, 가. ‘제주도 남로당 폭동 지령문서 입수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은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폭동을 일으키도록 명령하였다. 1948년 1월 22일 남로당 조천지부에서 열렸던 공산주의자들의 불법회의장을 급습한 경찰이 노획한 문건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킬 것을 요구했다. 또한 “경찰간부와 고위 공무원을 암살하고, 경찰무기를 탈취하라”는 지침이 발표되었다. (방첩대 정보요약, 2월 5일 노획문서 번역... C-3) 나. ‘소요 지령문 압수 제주도– 1948년 2월 12일 경찰과 방첩대는 남로당 본부를 급습해 많은 유인물과 1948년 2월 15일부터 3월 5일까지 계속하여 소요를 일으킬 것을 지시하는 서류를 찾아냈다.(B-2) 다. 남로당제주도당은 5·10선거 반대 2·7폭동지령을 받았고 그대로 투쟁했다. (1) 1948 2월 7일 남로당제주도당은 시위 95건, 불법집회 72건, 선동포스터 및 삐라살포 375건, 협박 공갈 27건을 도발하고, 동광리 이병돌 이장 집에 무장폭도 20명, 비무장 좌익계 남녀 100여명이 ‘단정반대, 반동타도’라는 구호를 외치며 침입해 가옥과 집기를 파괴하고 의류, 식량, 소, 마차까지 약탈해 갔다. 그 외 기록에 나타난 사건만 봐도 (2) 2월 7일 안덕지서 최창정 경사, 오두황 순경 생매장 기도 미수사건 (3) 2월 8일 성산면 고성리 시위사건, 성산면 신양리 오조리 시위사건, 함덕리 도로 차단사건, (4) 2월 9일 북촌리 경찰관 권총 피탈 사건, (5 )2월 10일 저지지서 습격 시도 사건, 고산지서 습격 시도사건 ※ 미군정보고서에 의하면 ‘2월 9일부터 11일까지 공산주의자들이 주동한 17건의 폭동과 시위가 발생하였다. ... 주목할 점은 많은 폭도들이 소련 국가를 불렀다는 사실이다.’ 라. 1948년 3월 15일경 전남도당 올구(조직 지도원)로부터 무장반격전에 관한 지시를 받았고, 마. ‘전남도당 올구를 중심으로 회합을 개최하여 첫째,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서 둘째, 단선단정반대 구국투쟁의 방법으로서 무장반격전을 기획 결정‘ 바. 1948년 3원 19일 중앙당이 남한 단선분쇄투쟁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성명서 발표 사. 현재까지 제주島남로당의 활동은 전라남도 道당의 지시를 받고 있다. 남로당제주島 위원회는 道당본부로부터 모든 지령을 받는다.(브라운 대령 보고서) 아. ‘이번 주 남조선에서는 경찰로부터 탈취한 무기와 사제폭탄 및 창으로 무장한 공산 주의 폭도들이 경찰지서 10곳을 공격했다. ... 경찰에 대한 조직적인 공격은 3월 27일 경찰지서 4곳에 대해 공격이 이루어진 경상북도의 한 지역에서 발생했다. 논평 : 공산주의자가 지원하는 소요들이 4월 초부터 시작될 여러 확실한 조짐이 보인다. 선거에 반대하는 공산주의자의 노력도 선거 1주일 전부터 재개될 예정이다. 붉은 5월 1일 기념일을 기점으로 선거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최후의 공격이 시작 될 수 있다. ※ 남로당제주도당이 1948년 2월 15일부터 3월 5일 사이에 폭동을 일으키라는 지령 내용을 실행하지 못한 한 가지 원인은 경찰이 1월 22일부터 26일 사이 도당 간부 등 핵심 세력 221명을 검거하여 조직이 노출되고 와해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48년 3월 1일 제29회 3·1절을 기해 남로당이 전국적으로 대규모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난무하던 시기에 4월 초 소요가 시작된다는 정보는 제주4·3과 일치한다. 7. 북한 또는 소련의 5·10선거 반대 지원 필자는 북한이나 소련의 4·3을 직접 지령했다는 근거를 찾지 못하였다. 또 있었다고 해도 근거가 남아 있을 리도 없다. 그러나 4·3이 단선반대투쟁인 만큼 이를 지원 한 간접적 증거는 미군정 문서에 많이 남아있다. 가. ‘일반적으로 공산주의자 활동에 관한 지령은 평양에서 내려진다. 그 지령들은 북한 해주에 있는 남로당 본부로 보내지고 매일 38선을 오가는 (공산당)요원들이나 잠입자들을 통해서 해주로부터 남한으로 전해진다. 몇 가지 C급의 보고는 연락이 중앙과 도의 남로당중앙위원회로부터 직접 게릴라 우두머리들에게 취해진다. 남한 내에서 통신은 일반적으로 남성과 여성 연락자에 의해 수행되었다. 대부분의 전달사항은 문서보다는 구두로 이루어진다. 북한당국의 또 다른 통제수단은 작전 계획 준비를 돕고 게릴라 전술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남한 각 도에 훈련받은 조직가를 파견하는 것이다.’ 나. 남조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지원의 일환으로 소련 최고 소비에트는 언론 및 라디오를 통해 광범위한 反선거 논평을 쏟아냈다. ... 평양 라디오는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대중집회에 관한 장황한 프로그램과 성명을 통해 남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지지를 이어갔다. ... 지난주 평양 라디오에서 남조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북조선의 금전적 지원이 북조선 관리에 의해 처음으로 시인됐다. 공산주의자 연사는 “...북조선의 모든 지역에서 북조선인민위원회로 보내진 성금은 남조선 인민에 대한 북조선 인민의 피가 끓는 형제적 지지를 증명한다.” 다. ‘1947년 4월 11일부터 4월 23일까지 심문받은 한 여간첩은 국제공산당이 북한에 2곳의 간첩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 이 학교에서 훈련받은 제5열분자들은 러시아 에서 훈련받은 장교 3명의 인솔 아래 50명씩 무리지어 남한으로 파견됐다. 남한으로 파견된 첫 무리는 1947년 3월 1일께 출발해 38선을 넘는데 1주일이 걸렸다. 이 여성은 이들 학교의 일부 졸업생들이 제주도에 공산테러훈련소를 세웠다고 밝혔다.’ ※ 필자의 판단은 38선 이북에 공산주의 소련군이 점령하지 않고 연합국인 영국이나 프랑스가 점령했다면 4·3은 불가능했을 것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소련과 북한 으로부터 남로당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영향이 전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 제주 4·3의 현재 – 아직 끝나지 않은 4·3 ⊙ 8. 제주4·3특별법 위헌적 개정안 발의 제주시 갑구 민주당, 송재호 국회의원(서귀포지역구 위성곤 등 민주당 국회의원 20명이 참여)은 5·18광주민주화법을 모방하여 제주4·3특별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개정 내용은 제주4·3사건의 진상조사 결과를 부인 또는 왜곡하거나, 희생자, 유족 또는 유족회 등 제주4·3관련단체의 명예를 훼손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헌법에 규정된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률이며 자유민주주의 헌법가치에 위배되는 법률이다. 이 법의 개악을 막아야 한다. 그래야 헌법에도 합치하고 세계 인권기구에서도 비난을 받지 않는다. 9. 4·3사건 관련 수형자(受刑者)에 대한 재판 진행 상황은? 4·3관련 일반재판 수형인은 1,500여 명으로 추정된다.(제주일보 2022.8.11. 1면) 그중 1명이 2020년 12월 제주지방법원 재심에서 무죄를 받고 형사보상금 1억5,462만 원을 받았다. 2022년 3월 33명을 시작으로 6월 21일 14명까지 4차에 걸쳐 제주지법 특별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수형인은 모두 52명이다. 특히 8월 10일 대검찰청 발표에 의하면 한동훈 법무장관이 ‘일반재판 수형인에 대해서도 직권재심청구를 확대하라고 지시’하였고, 2023년 1월 31일 9명이 추가로 일괄 무죄를 받았으며 직권재심은 가속화 될 것으로 보인다. 군법회의 수형인은 2,530명이다. 이중 18명이 처음으로 2019년 1월 제주지법 재심에서 무죄를 받아 형사보상금 총 53억4,000만 원이 지급되었다. 개인별로는 최소 8천만 원, 최고 14억7천만 원을 받았다.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할 배·보상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형사보상금 이외에 또 위자료청구가 남아있다. 생존수형인과 유족 39명이 명예훼손 및 정신적 피해를 이유로 124억 원의 손해배상 민사소송을 청구하여 2021년 10월 1심 선고가 나왔으나 결과에 불복하고 광주고법 제주민사부에 항소하여 2022년 8월 첫 변론이 시작된 상태이다. 진행 중인 군법회의 특별재심은 광주고등검찰청 소속 ‘제주4·3사건 직권재심권고 합동수행단’이 제주지법에 1~5차까지 20명씩, 6차부터 30명씩 일괄 청구하여 2022년 3월 1차부터 2023년 1월 31일 24차까지 총 671명이 일괄 무죄 선고를 받았다. 조만간 군법회의 수형인 전원이 무죄를 받고 이에 따른 형사보상금이 주어질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 더하여 민사로 손해배상이나 위자료 청구가 이어질 것이다. 해방 후 법적 제도적 장치나 절차, 종사자에 대한 훈련이 부족하였고 무엇보다 극도의 혼란기였으며 그나마 6·25전쟁으로 관련 문서가 없어져 유죄증거 제출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역사적 사실은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수준과 시대적 상황을 헤아려 판단하려는 노력 없이 지금의 잣대로 재판하고 있다. 더구나 문재인 정부 때 개정된, 직권재심청구신청 등 위헌적 요소가 다분한 4·3특별법에 따라 무더기 재심이 진행되고 있다. 억울한 사람이 무죄를 받는 것은 당연하나, 75년이 지난 지금 와서 일반재판과 군법회의 수형자 전원이 일괄하여 무죄를 받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남로당의 ① 대한민국 건국반대 투쟁 ② 제주4·3사건 도발 ③ 5·10선거 때 북제주 2개 선거구 선거무효화 ④ 북한정권창설 지원투쟁으로 지하선거 실시 ⑤ 대한민국에 선전포고 ⑥ 러시아 10월 혁명기념일을 기하여 제주도적화음모사건 ⑦ 6·25남침전쟁 발발 직후 북한 ‘인민군지원환영회’를 조직하고 대한민국 전복을 획책 ⑧ 5·10선거 선거관리위원 등 양민 1,764명을 학살하는 등 역사적 사실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과 가해자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제주4·3정부보고서의 모본(模本)이라고 할 『4·3은 말한다』에서 3만 명이나 된다는 남로당원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이렇게 되면 9년간 反대한민국 투쟁을 지속한 제주4·3사건의 주체는 누구인가? 형사보상금이나 손해배상을 누가 얼마를 받고 안 받고를 따지는 게 아니다. 당사자는 물론 4·3업무에 종사하는 관련 공무원, 학자, 언론인들은 물론 보상의 재원을 부담하는 납세자인 우리 국민 모두는 심사숙고해 볼 문제이다. 1949년 10월 2일 게릴라 249명을 대통령의 재가가 내려짐에 따라 제주비행장 인근의 해안가에서 처형했다는 미군정기록으로 보아 대통령 재가까지 받은 사실을 아무 근거나 절차가 없었다고 보기 어렵다. 6·25 때 출옥하여 일본으로 도피한 수형인 김민주(징역 7년, 호적명 김태형)나 문국주(무기징역, 본명 문옥주)의 행적, 언질, 저술을 보아도 그렇다. 여기서 필자는 수형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겠다. 그대는 남로당에 가입한 사실이 없는가? 남로당의 습격, 살인, 방화, 약탈, 납치, 테러, 협박, 선전선동 행위에 가담하거나 동조 또는 협조한 사실이 없는가? 이 질문에 분명히 ‘없다’고 답하고 그게 진실이라면 그는 재심선고대로 확실히 무죄다. 그게 아니라면 그는 비록 법적으로 무죄선고를 받았다 하더라도 실체적 진실과 역사적으로는 확실히 유죄다 10. 제주4·3평화공원 위패봉안실에 진설된 위패는 모두 적격자들인가? 제주4·3사건 희생자로 결정되어 위패봉안실에 진설된 위패 중에는 부적격자가 많이 있다. 4·3을 주동한 남로당제주도당 및 제주읍특별위원회 간부, 인민해방군 및 구국투쟁위원회와 혁명투쟁위원회 간부, 2연대 앨범에 수록된 자, 2연대와 9연대 탈영 입산 군인, 군·경 프락치, 『4·3은 말한다』 및 『미군점령기의 제주도인민들의 반제투쟁』과 『4·3장정』이나 『이제사 말햄수다』, 미군정보고서, 기타 경찰기록 등에 수록된 핵심들, 북한 인민군, 남파간첩 등은 희생자에서 제외시켜야 하지만 화해·상생이란 거창한 구호 아래 미동도 없다. 이들은 엄연한 4·3가해자이지 4·3희생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명예회복을 뛰어넘어 전부 희생자로 둔갑해 9천만 원이나 되는 거액의 보상금과 각종 혜택을 받게 되었다. 이게 정의인가? 11. 제주4·3평화공원 영상물이나 전시물은 공정하고 바르게 되어 있는가? 대검찰청 수사국에서 발행한 11권의 『좌익사건 실록』에 따르면 제주4·3이나 9월총파업을 각 1건으로 계산해도 대한민국 건국 전까지 남로당은 총 977개의 폭동을 일으켰다. 용산 소재 전쟁기념관 벽에는 해방 후부터 6·25전쟁 전날까지 군·경 전사자만 8,824명이다. 남로당이 저지른 대한민국 건국 반대 투쟁의 실상이다. 이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5·10선거 때 선거인 등록률 96.7%, 등록자의 89.8%가 투표해서 198명의 제헌의원을 선출했다. 국민 절대다수가 참여하고 지지하여 대한민국은 건국되었다. 평화공원 전시물이나 설치물에는 이런 내용이 없거나 있어도 매우 간결하다. 너무나 좌편향적이고 내용도 왜곡 날조되었다.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여기서는 마치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 ‘증오의 대상인 나라’, 자학사관의 교육장이 되어 있다. 그리고 제주4·3평화공원 전시실 초입에 있는 백비(白碑〈(無字碑〉)에 4·3의 正名을 새기려고 하는 모양인데 무엇이라고 새길까? 심히 염려된다. ⊙ 제주 4·3의 미래 – 진정한 화해·상생을 위하여 ⊙ 진정한 화해·상생의 당위성이나 필요성은 간절하고 시급하다. 그런데 군·경의 정당한 진압 임무를 왜곡하여 국가폭력이 양민을 학살했다고 주장해서는 화해가 어렵다. 지역저항사적 관점에서 탈피하여 국제정치로 시야를 넓혀 대한민국과 북한 정권 수립 과정 및 현실을 알아야 한다. 증오의 감정만을 고집할 게 아니다. 너도 잘못했지만 나도 잘못했다는 마음, 역사적 진실 앞에 겸허하고 솔직하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자세로 마주 앉으면 충분히 해결되리라고 믿는다. 12. 제주의 미래를 위해 4·3 관계자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가. 4·3사건 당시 인명 피해자들의 입장을 바라보는 시선들 (1) 무고한 희생자들을 바라보는 시선 4·3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군·경도 무섭고 山사람도 무서운 가운데서 전전긍긍하다가 양쪽에서 희생된 사람들이다. 전쟁은 본래 지옥인 것이다. 이들의 과거 고난을 글로 쓰라면 소설 한 권으로 족할까? 이들에게 국가가 보상하고 명예를 회복해 줘야 한다. 최근 정부에서 희생자 보상 문제가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2) 희생된 5·10선거관리위원과 우익인사들에 대한 시선 이 희생자는 그 가족을 포함하여 2천여 명으로 본다. 이들은 대한민국 건국 유공자들이다. 이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우리는 새 나라를 건국했고 자유와 인권을 누리며 풍요롭게 살고 있다. 이들은 원칙적으로 전원 현충원 등 국가유공자묘역에 있어야 하는데 제주4·3평화공원에 있다. 건국유공자는 4·3주동자와 무고한 희생자들 사이에 혼재되어 있다. 화해상생이란 명분에 묻혀 그들의 들러리로 격하되었다는 비판이 많다. (3) 남로당 간부 등 4·3사건을 일으킨 핵심 세력에 대한 시선 反대한민국 행위를 적극적으로 한 자들이다. 보는 이에 따라 1,500~3,500 명 또는 그 이상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필자는 일본으로 도피한 4·3주동자 김봉현·김민주가 실토한 3,000여 명을 핵심으로 본다. 브라운 대령 보고서 이미 언급했고 다른 미군정보고서에서도, ‘소문에 따르면 제주도의 좌익 무장대는 약 5,000명으로 추정되며 김장흥의 지휘아래 있다.’고 하였으니 3천명은 과장된 숫자가 아니다. 이들 남로당4·3주동자나 적극가담자들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했고, 4·3을 일으켰으며, 도민 1만여 명 이상의 생명을 잃게 한 원인 제공자이다. 그리고 북한 정권 수립에 앞장섰다. 이들에게 국민 세금으로 거액의 보상금과 각종 혜택을 주는 것은 아무리 화해상생의 차원이라고 해도 정의에 반하고 신상필벌의 원칙에도 어긋나며 대한민국 정체성을 부정하는 처사이다. 지구상 그 어느 나라에서 반란세력의 주동자들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한 사례가 있는가? 향후 대한민국이 전쟁 등 위기에 처한다면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그 주동자를 엄히 다스리지 않거나 더 나아가서 그들에게 보상과 혜택을 준다면 국가가 제대로 생존하며 누가 국가에 충성하겠는가? 필자는 이를 걱정하는 것이다. 보상을 해준다면 4·3사건 당시 대한민국 방침에 적극 호응한 선량한 도민들에게 주는 게 더 옳다. 그들은 해안마을로 소개(疏開)하라면 소개했고, 복귀하라면 복귀했고, 성담을 쌓으라면 쌓았고, 보초를 서라면 보초를 섰고, 노력 동원에 나오라면 불평 없이 나갔으며 물심양면으로 군·경을 지원한 숨은 애국자들이다. 당연한 국민의 의무라고 생각했고 병역의무와 납세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 오늘의 번영을 이룩한 숨은 공로자들이다. 이들은 4·3 광풍의 혼란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기에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착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보상과 혜택이 반대로 남로당 4·3주동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4·3주동자들에게 추모나 보상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그들 자신도 공산통일혁명전사(戰士)로서 공산통일혁명전사(戰史)에 길이 남기를 바랄 것이며 대한민국의 추모나 보상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들이 보상을 원한다면 북한으로부터 받는 게 순리다. 순전히 개인적으로 돌아와서 ‘나도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격랑에 떠밀려, 그들과 함께 행동했을 수도 있었겠다.’라고 역지사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란 냉엄한 것이고 결과에 책임을 묻는 것이다. 과연 그들이 택한 이념과 행동이 옳았느냐를 역사는 끝까지 추궁하는 것이다. (4) 남로당 핵심 세력 유족들을 바라보는 시선 아버지가 공산당을 했든 4·3에 가담했든 그 문제는 아들이 알 수도 없고 책임 또한 없다. 그들은 오로지 생물학적 자식일 뿐이다. 그동안 죽을 고생을 하면서 자랐고 성장한 후 사회진출을 시도하였으나 연좌제로 좌절을 맛보게 되면서 대한민국을 원망하게 되었다. 인간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있고 진짜 4·3과 관련이 있는지 의문과 원망이 뒤섞일 수밖에 없다. 죄과를 전해 들었다 해도 家系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도 강렬할 것이다. 지인들이 있다 해도 비디오로 촬영해 둔 것도 아니고 그의 말을 믿고 싶지도 않다. 이점을 이용하여 증언자를 협박하는 사례도 있다. 그러나 역사는 남아 있다. 여기서 해당 유족들은 감성보다 이성적 사고와 반응을 보일 필요가 있다. 4·3의 성격을 제대로 알고 받아들여야 한다. 증오의 감정을 버리고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살아왔고 살고 있으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옳고 바른 대한민국 현대사를 이해하여야 한다. 진정성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협상과 이해의 폭은 확대될 것이며 화해에 한걸음 다가갈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장애가 엄존한다. 정치권의 개입과 좌파측의 강력하고 광범위하며 조직적 선동과 회유가 있어서다. 나. 4·3 당시 정부 측을 바라보는 시선 당시 4·3진압작전을 수행한 군·경을 국가폭력의 화신으로 규정하고 선량한 도민 3만여 명을 학살했다고 매도하는 실정이고 문재인 대통령도 제70, 72, 73주년 추념사에서 ‘국가 폭력’이라는 말을 9회나 언급하였다. 여기에는 진압과정에서 벌어진 인권침해 사례들을 일방적으로 쏟아낸 결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남로당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된 주장에 기인한다. 당시 국제정치적으로 보나 해방 이후의 혼란 등 어려운 상황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5·10선거를 앞두고 4·3무장폭동을 방관할 수 없는 불가피한 면, 즉 진압의 당위성이 있었다. 4·3정부보고서에 기록된 가해자별 통계를 보면 토벌대가 10,955명(78.1%)이고 남로당 공비들이 살해한 숫자는 1,764명(12.6%)이다. 인민유격대가 가해한 숫자가 토벌대에 비해 훨씬 적지만 그들의 잔인성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당시 조천리에 살던 이월색 1936년생 여인의 증언에 의하면 남로당에 비협조한다는 이유로 1948년 11월 10일 父, 母, 숙부, 동생 9세, 7세, 4세, 3세, 2세 등 8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했다. 본인도 중상을 입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남원리에 거주하는 정남국(일명 정남휴) 1916년생은 민보단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1948년 11월 28일 임신 6개월 된 부인, 자식 10세, 8세, 6세, 누이동생 25세, 그의 자녀 3세, 2세, 1세, 둘째 누이동생 17세, 집에 같이 살던 외가쪽 친족 아이 15세 등 10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했다. 이런 일이 한 둘이 아니다. 독립운동가 이도종 목사를 생매장하기도 했다. 끔찍한 일이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남로당을 역사적으로 면책하거나 정당화할 수 있는가? 따라서 당시 상황과 4·3의 성격 하에서 진압 군·경의 공과를 바르게 평가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은 험난했다. 무고한 희생자가 다수 발생하였지만 군·경은 대한민국을 건국하여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확고히 하는데 초석이 되었다. 27만여 명의 선량한 제주도민을 지켜냈고, 김일성의 공산 치하 생지옥을 막아냈다. 남로당의 末路처럼 숙청되거나 요덕수용소 신세를 면했다. 거듭 말하지만 이러한 군·경의 공로를 인정한 후에 비판과 무고한 희생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이 필요한 것이다. 맺 는 말 지금까지 4·3에 대하여 생각나는 몇 가지를 대강 살펴봤다. 제주4·3사건은 남로당이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고 소련과 북한 노선에 따라 공산통일을 위하여 무장 폭력을 행사한 폭동이고 반란이다. 이것이 4·3의 성격이고 본질이다. 남로당의 강령, 구호, 만세, 깃발, 노래, 벽보, 삐라, 연설, 신문, 지령문 등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낡은 이념논쟁을 걷어치우라’는 공세로 인해 4·3 주체인 남로당은 논의의 장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며 그들이 저지른 만행은 ‘화해와 상생’이라는 거창한 구호 아래 모조리 묻혔다. 심지어 ‘좋은 나라를 꿈꿨던 제주4·3’이라고 남로당과 4·3반란을 미화하고, 4·3주동자를 무고한 희생자로 둔갑시키는가 하면 4·3을 민중항쟁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4·3을 진압하면서 발생한 무고한 도민 희생이 있었다. 이것은 4·3을 진압하면서 초래된 부차적 사안이다. 4·3의 진실과 본질을 규명하고 난 후에 인명 피해에 대해서 그것도 쌍방 공히 비판할 일이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先진상규명이고, 後 희생자 명예회복이다. 4·3은 이제 75년이 지났다. 제주도의 발전과 번영을 위하여 산적한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선 화합해야 한다. 그러려면 서로가 자기 측의 역사적 잘못을 진솔하게 인정하는 자세로 마주 앉아야 한다. 4·3진압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자가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또 이들을 기리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남로당의 공산통일을 위한 폭동 반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민중항쟁으로 굳히려 한다면 화해는 요원하다. 최근에는 4·3을 통일운동으로 미화하려는 움직임까지 공공연히 제기되고 있다. 4·3주체가 추구한 목표가 자유민주의 통일이라면 문제될 게 없지만 그게 아니고 공산통일운동이니까 민중항쟁이 될 수 없다. 쌍방이 각자 양심으로 돌아와 우리는 역사 앞에 겸손하고 솔직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현실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는 좌파는 6·25북침설을 주장했던 브루스 커밍스 교수나 심지어 전 동티모르 대통령 호세 라모스 오르타 노벨평화상 수상자 등을 불러다가 그들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왜곡 날조된 사실을 고착화하고 전국화, 세계화, 미래화에 총력을 쏟고 있다. 우파에게는 이에 대처할 사람도, 조직도, 예산도, 통로도 완전 차단되어 있다. 제주4·3史가 정립되어야 대한민국이 바로 선다는 점은 확실한데도...... . 그런 의미에서 너무 좌편향적이고, 왜곡되고, 진상규명보다 인명피해에만 집중했고, 틀린 내용이 허다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양심적인 학자에 의해서 다시 써야 한다. 왜냐하면 위 정부보고서는 『4·3은 말한다』 복사본 같다는 비판이 많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면서 한 가지 부연하고 싶다. 2022년 제74주년 4·3희생자추념식에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참석했다. 국가를 수호하고 국군통수권자가 될 대통령 당선자의 4·3 추념사에는 마땅히 제일 먼저 대한민국 건국 희생자인 군·경과 애국인사를 추모하고 그 유족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 다음, 남로당의 행위를 역사적으로 준엄하게 꾸짖고 나서,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무고한 희생자들을 추념하고 그 유족에게 위로의 말과 함께 보상과 명예 회복 방침을 밝혔어야 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의 추념사에는 위와 같은 내용이 없었다. 제주4·3사건이 폭동·반란인 이유 1. 남로당제주島당은 1948년 4월 3일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려고 무장 폭동· 반란을 일으켜 1957년 4월 2일까지 만9년 간 대한민국에 항적하며 5·10총선 선거관리위원 등 양민 1,756명을 살해했다. 2. 1948년 4·3사건 발발 후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을 개방할 때까지 제주도내 모든 마을 주위에 성을 쌓고, 남로당 공비들의 습격 살인 방화 약탈 납치를 막기 위하여 남녀노소가 총동원되어 밤낮으로 경비를 서게 했다. 3. 남로당제주島당은 1948년 5·10제헌의원 선거 때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유일하게 북제주 2개 선거구 선거를 파탄 내어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 하였다. 4. 1948년 5·10제헌의원 선거 때 선거인 등록율 91.7%, 투표율 95.5%로 국민 절대 다수의 참여와 지지를 받고 1948년 8월 15일 건국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하여 남로당제주島당은 8년 7개월 17일 간 항적하였다. 5. 4·3주동자 남로당제주島당 인민해방군 초대 사령관 김달삼(본명 이승진)은 박헌영 지령에 따라 살인 방화 테러로 지하선거를 실시하여 52,350명 투표지를 가지고 월북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앞장섰다. 6. 김달삼은 1949년 8월 북한 강동정치학원 출신자 300명으로 구성된 제3병단을 이끌고 태백산지구에 남파되어 대한민국 전복을 획책하였다. 또한 이덕구는 제2대 인민해방군 사령관으로서, 1948년 10·19여순반란사건 직후인 10월 24일 대한민국을 상대로 선전포고하고 항적했다. 북한은 김달삼과 이덕구에게 국기훈장 2급과 3급을 줬고, 평양 신미동 애국열사묘역에 묘비를 세워 추모하고 있다. 7. 4·3주동자 김달삼·안세훈·강규찬·고진희·이정숙·문등용은 월북하여 북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어 북한정권 수립에 앞장섰다. 8. 남로당제주島당은 6·25전쟁 발발 직후, 국운이 백척간두에 처했을 때 각 읍·면별로 인민군지원환영회를 조직하여 빨치산과 합세, 공세를 강화하고, 북한인민군이 상륙하면 그들과 함께 대한민국 전복을 획책했다. 9. 월북한 4·3주동자 안세훈·강규찬·고진희·조몽구 등은 6·25 때 북한군과 함께 남침하여 대한민국에 항적하였다. 10. 제주4·3발발의 주체는 남로당이고 남로당은 조선공산당의 후계체이며 남로당강령은 마르크스·레닌 사상에 입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고 건국 이후에도 계속 항적하였다. 11. 남로당제주도당 인민유격대원들은 인공기를 곳곳에 게양하였고 적기가와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부르며 살인 방화 약탈 납치를 자행하였다. 12.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11월 23일 미국 CNN방송의 ‘문답 아시아’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제주4·3은 공산당의 폭동으로 일어났’다고 전 세계에 천명하였다. 13. 남로당 대정면당 위원장 이운방은 4·3 ‘주도자는 빨갱이로 봐야지, 최종 목적은 공산주의니까. 그들의 우선 목적은 통일조국 건설이고’라는 증언을 하였다. 14. 제주도민전 문화부장으로 1947년 3·1기념투쟁을 진두지휘한 김봉현은 일본 으로 도피해서 김민주와 함께 쓴 책에서 3회나, 4·3은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 창건을 위한 투쟁이라고 명기했다. 15.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1월 17일 국무회의에서 제주도지구 계엄선포를 의결하면서 제주4·3사건의 성격을 ‘제주도 반란’이라 규정했다. ※ 필자 약력 1941년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에서 출생 애월상업고등학교(현 애월고등학교) 졸업 해병대 자원입대(126기) 병장 만기 제대 서귀포 및 제주경찰서장 제주도재향경우회장 등 역임 ※ 저서 『내가 보는 제주4·3사건』 수정증보판, (삼성인터컴, 2011) 『레베데프 비망록』, (해동인쇄사, 2016) 『남로당제주도당 지령서 분석』, (퍼플, 2017) 『제주4·3사건 문과 답』 개정완결판(제4판, 나눔사, 2022) : T 02-359-3429 ※ 이메일 : yeongjoong.kim@hanmail.net pdf 다운로드 : https://drive.google.com/file/d/1oIsImlF1da2-LUXKipp4Nn8bMN7kkBVw/view?usp=share_link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보이지 않는 손>의 김인호입니다. 오늘은 한국 경제의 뒤안길, 다음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제 이야기만 너무 하면 여러분들이 재미없을 것 같아서, 오늘 저(한국 경제의 뒤안길) 제목을 갖다가 제가 모셨던 역대 대통령들을 경제적인 관점에서 또 특히 시장 경제적인 관점에서 한번, 주제는 없지만 평가를 좀 할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분들이 한 이야기를 전부, 또는 경제 정책에 중요한 걸 다 알리려고 한다면 이것만 가지고 채널 전체를 구성해도 모자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주 요약해서 말씀드리려고 하고 이승만 대통령부터 마지막 박근혜 대통령 압박까지. 물론 그 사이에 제가 직접 정부에 있으면서 같이 일하지 않은 노무현 대통령 혹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말할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빼려고 생각합니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을 말씀드리려고 하니까 조금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제가 4.19 혁명이 났을 때 대학교 1학년생이었어요. 그리고 제가 4.19혁명에 직접 참여를 의거에 직접 참여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청와대 그 당시 경무대라고 불리우는 효자동에 제일 경무대에 가까운 그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는 데까지 데모를 하러 갔었고, 그때 저희가 거기서 데모를 할 때 처음으로 발포가 이루어졌고, 제 옆에 있던 우리 대학 동기 고등학교까지 동기인 아주 참 훌륭한 좋은 친구였던 친구 한 친구 총에 맞아 죽었고, 이러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사실은 제가 젊었을 때는 그렇게 좋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그 당시에 그보다 더 어릴 때 어떤 이야기를 들었느냐. 어른들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승만 대통령은 외교에는 귀신이고 내정에는 등신이다. 외교는 잘하는데 내치를 잘 못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했어요. 저도 그렇게 듣고 컸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는데. 제가 이제 정말 경제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을 하게 되고, 경제를 깊이 있게 생각하면 과거를 뒤져볼 수밖에 없어요. 과거를 모르는 현재라는 건 있을 수 없고, 현재의 위치를 확인 안 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제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알고 있던 게 너무나 잘못 알고 있던 것이 많고 너무나 단편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구나(하고 생각하게 됐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외교만 잘한 게 아니에요. 그 양반이 만든 게 이 한미 동맹. 이게 뭐 좌익 사람들 혹은 북한 혹은 중국에서는 뭐 이걸 통해가지고 미국이 한국을 지배한다 한국 남한이 미국의 식민지다 어쩐다 이야기하지만, 한미 동맹이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됐겠는가. 더 나아가서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동북아 전체가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기 시작한 날부터 전쟁이 없었어요. 이 화약고 같은 동북아의 칠십년 가까운 기간 동안에 전쟁이 없었다. 이것이 오늘의 동북아가 특히 중국이, 그리고 한국이 그리고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우뚝 선 경제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심지어 중국조차도, 미군이 존재했기 때문에 전쟁이 안 났다 하는 사실에 대해서 인정할 겁니다. 나는 이호 목사라는 분이 이 와 같은 내용을 어느 책에 쓴 걸 보면서 이건 참 대단한 생각이다. 한미동맹 때문에 한국이 발전했다는 건 내가 알고 있었지만 동북아 전체가 한미동맹에 영향을 더 걸 봤다. 이거는 특결이다. 이렇게 제가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순수히 경제적인 시각에서 얘기합시다. 정치적으로는 그분의 공과가 너무 많은데 경제적인 시각에서 보면 우선 이 헌법 자유시장 경제의 원칙을 천명했다는 것. 그 당시에 우리나라 사람들 남한 사람들의 약 70%가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에 자유시장경제의 원칙을 천명한 것. 이 헌법은 이승만 박사가 사실상 승인함으로써 이루어진 헌법입니다. 우리나라 초대 제헌 때 만들어진 헌법. 농지개혁 이 어려운 일을 해냈어요. 만약에 농지 개혁을 안 했더라면 6 25 때 우리나라는 완전히 공산화됐을 겁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특히 농민들이 다 정부를 지원하고, 인민군 북한에 반기를 들 수 있었던 것은 이 농지 개혁의 덕분이었다. 의무 교육을 실시한 것. 그럼으로써 한국민들의 지적 수준을 갖다가 높여서 문화 국가로 가야 되겠다. 세계 1등 국가로 가야 되겠다고 하는 발판을 놓은 것. 특히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이 원자력에 관한 겁니다. 1950년대 대한민국 1인당 국민소득이 100불도 안 되던 그 시절에 이승만 대통령이 원자력에 문제에 눈을 떴단 말이에요. 19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계기로 여러 가지 과학기술을 미국으로부터 도입하게 되는데, 그 일환으로서 1956년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한미 협정을 체결했어요. 지금 보면 웃기는 양이 아니에요. 그 아무것도 없는 한국 약불도 안 되는 소들을 가진 나라 한국이 그때 이미 원자력 협정을 미국과 체결했다. 누가 주도했냐 이승만 대통령이 주도한 겁니다. 그 직후에 문교부에 원자력과를 설치했어요. 백 명에 가까운 원자력 연구소를 미국에 파견했습니다. 1958년에 국제원자력기구, 많이 나오죠 IAEA(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북한이 탈퇴했다고 하는 이 IAEA에 우리가 가입을 했습니다. 처음 1959년에 원자력연구소를 설치해가지고 거기에 원자로를 설치했단 말이에요. 1959년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원자력공학과가 처음으로 신설되었습니다. 저는 1960년에 대학에 들어갔는데요. 제가 대학 들어가기 그 전에 저보다 한 1기 앞선 원자력공학과가 이미 생겼다. 저는 이러한 기록을 새삼스럽게 보면서, 이분이 가졌던 해안 미래를 내다보는 그 탁월한 예지력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 형편입니까. 이렇게 해서 만들어놓은, 그래서 1960년도부터 지금 약 60년에 걸쳐서 이 60여 년 약 70년에 가까워 해서 세계 최고의 원자력 기술 국가가 돼 있는 대한민국입니다. 한국의 원자력, 제가 (구체적인) 넘버를 잊어 버렸습니다마는, 한국형 원자력이 개발돼서 미국조차도 이것을 인정한 (경우입니다). 미국이 미국 밖의 원자력을 인정한 유일한 케이스인 이 정도의 기술력을 쌓은 대한민국의 원자력을 갖다가, 지금 다 폐기하고 줄이고 내버리겠다. 저는 이걸 국가적 자살 행위다 이렇게 부르는데 지금 이 정부는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생각하면서, (또) 오늘의 우리나라를 보면서 참 참담한 생각을 - 특히 원자력 이 부분에 대한 참담한 생각을 - 금할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 이분의 경제적 업적(에 대한 이야기). 설사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혁명을 일으켜서 집권을 한 그 과정, 또는 집권을 하고 정국을 운영해가는 과정에 있었던 독재, 이런 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 한국의 야당들은 결국 박정희 대통령 정부와의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이겨서 결국 집권해 문민정부로 넘어가게 되는 그런 길을 닦게 되는데, 그런 사람들조차도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에 대해서 기여한 역할 공로를 인정하는 데는 그렇게 인색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그 분이 뭘 했다. 뭐 했다는 걸 다 알기 때문에 제가 말씀드릴 필요 없고 제가 시장주의적인 입장에서 볼 때 박정희 대통령, 오늘날 제가 생각하는 의미의 시장주의자는 결코 아니었어. 그러나 그분은 시장을 이해하는 분이었어요. 특히 시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업의 생리. 기업이 어떻게 뛰느냐 움직였느냐 기업의 이윤 동기, 기업은 이윤를 추구하는 주체다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인식. 두 번째, 군인들이 정권을 잡았는데 경제는 군인들 힘만 가지곤 안 돼. 전문가 전문 관료들의 도움을 정부 안에서는 받아야 되지만, 정부 바깥에서는 기업하고 같이 똘똘 뭉쳐서 이 경제를 부흥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돼. 저는 이걸 가지고 <한국 주식회사의 신사>다 이렇게 작명을 했습니다. 이건 제가 붙인 이름입니다. '한국 주식회사의 신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란 말이죠. 그래서 이 기업들이 그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 집권했을 때, 다 잡혀가는 걸로 생각하고 다 숨어버리고 뭐 정부하고 어떻게 해야 될까 길을 헤매고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이병철 회장을 비롯해서 주요 기업인들 불러서, 당신들 과거 다 불문에 붙일 테니까 앞으로 나하고 같이 한국 경제를 일으키는데 힘을 합치자. 기업에 대한 일정한 이윤을 추구하는 걸 인정해주겠다. 그래서 한국경제가 발동이 끌리기 시작한 거다 말이죠. 특히 이분은 우리가 무역을 앞으로 해야 된다. 무역의 중요성을 이해했던 분입니다. 우리나라 한국무역협회가 있지 않습니까. 삼성동에 가면 큰 건물, 무역 타워 트레이드 타워(한국종합무역센터)라고 하는 이렇게 생긴 건물이 있죠. 코엑스가 있고, 거기 백화점이 있고 호텔이 있고 뭐 공항 터미널이 있고, 그 방대한 무역센터가 다 무역협회에 (있죠). 재산 기본조조산이고 활동 기반인데 이 무역협회가 언제 만들어졌는가? 제가 29대 한국무역협회 회장을 3년 임기 채 못 채우고 나왔습니다만, 3년 가까이 한 사람입니다. 저도 무역협회가 글쎄 뭐 박정희 대통령 집권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건 분명하지만 한 50년대 언저리 어디에 만들어졌지 않겠느냐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회장이 되고 나서 역사를 알아보니까 1946년에 설립이 됐어요. 우리나라 정부가 언제 설립됐습니까 1948년에 설립이 됐단 말이죠. 정부가 설립되기 이전에 한국의 무역협회가 (말이죠). 아무것도 없는 무역선 통통선 하나 겨우 오징어 몇 마리 잡아다 파는 것이 무역 수출 품목의 전부이던 시절에, 한국이 장내에 볼 때 자원이 없는 나라가 무역을 통하지 않으면 경제를 일으켜갈 수 없다라고 하는 생각을 가졌던 선각자 105인이 모여서 만든 협회가 오늘의 무역 협회입니다. 삼성동에 있는 방대한 기구와 자산을 가지고 있고 한국 무역의 민간을 대표하고 있는 그런데 이 그 무역협회를 실질적으로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하고 2대 때부터 무려 17년간 회장을 한 분이 있습니다. 이활이라고 하는 분인데 이분이 우리가 해서 참 잊을 수가 없는 분이에요. 근데 이분이 516이 나자 과감하게 박정희 대통령한테 면담을 신청해서 박 대통령을 찾아(갔습니다). 그 당시 박정희 장군을 만난다는 건 참 굉장히 어려운 일일 뿐더러 잘못하면 굉장히 위험한 일일 수도 있는 거죠. 특히 경제인의 입장에서는 스스로 찾아가서 한국 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한국은 앞으로 무역을 통해서 경제를 부흥시켜야 한다 하는 점을 강조하고, 박 대통령이 거기에 동의하고 당신 말이 옳다. 그렇게 하자 그렇게 해서 한국이 무역 입국의 기치를 내걸게 됐단 말이죠. 물론 그 뒤에는 이것이 보다 더 큰 대외 개방 국제화 국제 소위 글로벌 스탠다의 어떤 수용 이런 더 고상한 정책으로 바뀌어 갑니다마는, 저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에 대한 안목 특히 시장에 대한 이해 그것은 참 그 당시 기준으로서는 참 놀라울 만한 일이다. 2차 대전 이후에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나라들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그 나라 중에 어떤 나라도 시장 경제를 채택한 나라가 거의 없어요. 다 정부가 군사 정부가 독재적으로 혼자서 경제를 다 운영하겠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어디로 가겠습니까. 사회주의 경제 체제로 흐를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해서 경제 다 말아먹고 다 국민을 도탄에 빠뜨리고. 그러고 나서 또 혁명이 일어나서 정권을 빼앗기면 또 새로 집권한 사람은 또 그 전체를 바로 밟고. 오늘날 베네주엘라나 남미의 여러 나라들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게 세계의 일반적 패턴이에요. 이 독재자들이라는 건 국민을 잘 살게 만들면 안 된다는 생각을 속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어떻게 피시(낚시)할지 몰라도 왜 국민이 잘 살게 되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추구하겠습니까. 먹을 만하면 다음에는 자유를 추구하게 돼 있고, 민주주의를 찾게 되어 있고, 국민의 기본적 권한이 어쨌더니 하고 나오게 돼 있기 때문에, 골치 아프고 위험하다. '국민을 다 가난하게 만들어서 결과적으로 국가에 의존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내가 장기 집권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 독재자들의 일반적 사고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박정희 대통령이 10.26을 맞아가지고 물론 부하의 손에 돌아가셨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시기 이전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경제적 성과 때문에, 이제 먹는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자유를 추구하는 국민들의 저항이 지기 시작했던 거란 말이죠. 그래서 이것이 이제 점점점점 가열되던 시기 10.26 이 생겨가지고 박 대통령은 저 세상으로 갔단 말이죠. 어떤 의미에서 저는 '박 대통령은 그분이 스스로 이룩한 성공, 특히 그 경제적 성공에 의해가지고 성공 때문에 그 희생물이 된 것이다' 라고 생각해도 틀린 말이 아니지 않겠는가 -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때는 제가 사무관, 또 과장 한 중참 때 정도까지만 박정희 대통령 정부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사실상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쳐다보면서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는 그런 기회는 없었어요. 사실 그럴 수 있는 기회는 그다음 전두환 대통령 물론 그 사이에 최규하 대통령이 잠깐 있었지만, 그분은 언급할 필요가 없고. 전두환 대통령의 집권한 이후에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쳐다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가) 있게 되는데, 그 이야기는 상당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 다음 기회로 미룰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고, 다음 번에 전두환 대통령 이후의 대통령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상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이지 않는 손'의 김인호였습니다. (트루스포럼 = 윤찬호 기자)
서울대 민주화교수협의회는 각성하라! 문재인과 조국, 이재명엔 왜 침묵하시나! 북한의 반민주독재엔 왜 철저히 침묵하시는가! 서울대 민교협은 문재인 정권의 실정엔 굴욕적인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이는 서울대 민교협이 이미 객관성을 상실한 이념집단임을 말한다. 공정과 상식을 들먹이면서도 아직까지 서울대 교수직을 유지하는 조국 교수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시는가! 조폭과 함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겁탈하려 한 이재명엔 왜 이리 관대하신가! 이들에게 침묵하는 것이 학자적 양심인가! 이것이 서울대 민교협의 수준이고 민낯이 아닌가! 순수한 민주화 운동과 민주화를 빙자한 기회주의 세력, 반대한민국 세력을 예리하게 분리해 내는 것이 우리 시대의 사명이다. 이런 시대적 요구를 직시하지 못한다면 서울대 교수라는 허울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의 외침은 한낮 선동으로 전락할 것이다. 복잡한 이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더라도 현 정부가 제시한 강제동원 배상안 해결방식은 김명수 대법원의 기형적 판결에 대응하고, 문정권이 헤집어 놓은 한일관계를 정상화하여 발전적인 양국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미래를 향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다. 또한 이미 연로하신 피해당사자들께 신속한 보상을 드리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동안 비굴하게 침묵해 온 민교협이 성명을 발표했다. 서울대 민교협은 객관성을 상실한 좌파 이념집단에 불과하다. 서울대는 민주를 빙자해 사회주의를 추종하고 북한과 연결된 좌익세력의 해방구였다. 60년대 통혁당 사건이 그랬고, 월남패망에 희열을 느껴 이를 모방해 게릴라전(빨치산)을 시도하려던 70년대 인혁당 및 남민전 사건, 80년대 주사파 운동권이 그랬다. 그들의 족적은 아직까지도 87체제에 기반을 둔 학생회 시스템과 이념 동아리를 통해 이어져 오고 있다. 민교협 역시 그 잔재는 아닌가! 반일 선동은 북한의 역사무기 전략의 일환이다. 민교협이 민족의 진정한 민주화를 갈망하는 균형 있는 지성이라면 북한의 이러한 전략을 지적하고 경계함이 타당하다. 나아가 북한의 반민주독재에 저항할 것이다. 하지만 민교협은 북한 김씨 왕조가 자행하는 반민주독재의 참상엔 일언반구 언급도 없다. 북한에 대해 내재적 접근을 강변하시는 교수들께서는 왜 이승만, 박정희에 대해 동일한 잣대를 허용하지 않으시는가! 자주·민주·통일을 내세운 북한의 통일전선전술에 농락당한 교수들께서는 이제라도 참회하는 심정으로 북한 주민들의 해방을 앞당기는데 일조하시라! 민교협은 지난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도 앞장섰고 성명을 냈다. 문정권을 지나오며 많은 사람들이 각성한 것처럼 탄핵사태의 본질은 체제전쟁이었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세력의 준동이었다. 당시 728명의 서울대 교수들이 서명했다. 이번 서명에 참여한 인원이 그에 한참 못 미치는 50여명이라는 소식은 그나마 반가운 일이다. 민교협 교수들께서는 이제라도 반성하시고 각성하시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당신들이 민주화를 빙자한 적폐가 되어 시대의 소명을 각성한 이 땅의 청년들과, 반민주독재 정권에 억눌려 온 북한의 민중들에게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2023.03.20 서울대 트루스포럼 snu.truth.forum@gmail.com
자유민주당과 함께 서울대 시진핑 자료실 폐쇄를 촉구하는 현수막을 게시했습니다. 현재 서울대 정문과 후문을 비롯해서 서울 시내 주요 지역에 60 여 개의 현수막이 게시되어 있습니다. 이번 현수막은 서울대 트루스포럼 동문회원이시고 공자학원실체알리기운동본부 대표이신 한민호 대표님의 후원으로 진행됐습니다. 한편, 서울대 학내에는 서울대 트루스포럼 회원들이 시진핑 자료실 폐쇄를 촉구하는 포스터를 게시했습니다.
트루스포럼은 매월 첫째주 토요일 광화문에서 찬양 버스킹을 합니다. 오늘은 오후 5시 반에 시작합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광화문은 대한민국을 처음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나라를 세우기로 약속한 곳입니다.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이신 이승만 대통령은 제헌 의회에서, 또 대통령 취임식에서 그렇게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동포들의 해방을 기원했습니다. 대한민국 부국 대통령이신 박정희 대통령도 6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바로 이곳에서 북한 동포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 엄숙히 선서했습니다. 우리가 매월 첫째 주 토요일, 광화문에 모이는 것은 그 약속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근본적인 회복과 북한의 해방을 위해 함께 기도하실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 트루스 프레이즈 / 광화문찬양 2023.03.04(토) 오후 5:30, 광화문 앞
매주 월요일 오후 12:30, 서울대 자하연 앞에서는 캠퍼스 찬양이 진행됩니다. 서울대에서 진행되어 온 캠퍼스 찬양은 서울대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서울대의 영혼들이 진정한 아름다움이신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망하며 드리는 예배입니다. 특별히 02.27일엔 트루스캠프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이 함께합니다. 함께 기도해 주세요! You are here, moving in our midstI worship You I worship YouYou are here, working in this placeI worship You I worship You You areWay maker, miracle worker, promise keeper Light in the darknessMy God, that is who You are Even when I don't see it, You're workingEven when I don't feel it, You're workingYou never stop, You never stop workingYou never stop, You never stop working The Lord bless you And keep you Make His face shine upon you And be gracious to you The Lord turn His Face toward you And give you peace May His favor be upon you And a thousand generations And your family and your children And their children and their children May His presence go before you And behind you and beside you All around you and within you He is with you He is with you In the morning in the evening In your coming and your going In your weeping and rejoicing He is for you He is for you He is for you He is for you He is for you He is for you He is for you He is for you He is for you He is for you
신입생환영회, 민중의례 폐지를 환영합니다! 민중의례가 무엇일까요? 민중의례는 국민의례를 대체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대한민국을 부정하며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80년대 운동권 세력의 은밀한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80년대 부터 시작된 민중의례가 서울대 사회대 새터에서 중단된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80년대 운동권이 학생회를 장악한 이후, 입학식보다 먼저 진행되는 신입생 환영회인 새터에서부터 운동권 문화는 신입생들에게 대학사회의 암묵적인 질서로 교육되어 왔습니다. 그런 문화가 지난 40년을 지배해 왔습니다. 민중의례 폐지를 환영하며 대학문화의 새로운 변화를 기대합니다. 총학생회 홈페이지, '민중해방의 불꽃' 삭제를 환영합니다. 서울대 총학생회의 모토는 '민중해방의 불꽃'입니다. 이는 민주화를 빙자하며 막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에 심취한 80년대 운동권이 학생회를 장악해 온 역사를 반영하는 이름입니다. 서울대 총학생회를 대표하는 노래, 서울대 총학생회가(歌) 역시 이런 배경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서울대 총학생회 모바일 홈페이지에는 '민중해방의 불꽃 서울대 총학생회'라는 이름이 대문을 장식했습니다. 총학생회 관계자들도 '민중해방의 불꽃'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개편된 서울대 총학생회 홈페이지는 '민중해방의 불꽃'이란 표현을 삭제했습니다. 총학생회가도 자취를 감췄습니다. 운동권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서울대 총학생회 '정오'의 이러한 시도들을 환영합니다. 이 또한 40년만의 변화입니다. 하지만 아직 80년대 운동권 문화의 잔재들이 곳곳에 묻어있습니다. 총학생회 회칙은 87년에 제정된 것이고 운동권 선배들과 잔존세력들은 이런 규정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습니다. 극좌 조직에 가입한 행동가들이 총학생회 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좌파정당의 학내 창구역할을 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단과대학의 반 이름에는 운동권 냄새가 묻어나는 여러 명칭들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단번에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40년 만의 변화를 환영하며, 이러한 변화가 대한민국의 근본적인 회복과 북한의 해방으로까지 나아가기를 기대해 봅니다. 2023.02.21 서울대 트루스포럼 snu.truth.forum@gmail.com ps. 트루스포럼은 새학생회 운동을 통해 서울대 총학생회의 모토인 '민중해방의 불꽃'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왔습니다. *관련포스팅 [서울대][새학생회] 서울대 새학생회 성명서 /본부앞 기자회견 2021.04.16.(금) 오후 2시 / 관련기사 및 사진 포함 https://truthforum.kr/0302/70 [서울대][새학생회]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모바일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민중해방의 불꽃' 서울대 총학생회 표기 https://truthforum.kr/0302/56 [서울대][새학생회] '민중해방의 불꽃', 서울대학교 총학생회가(歌) https://truthforum.kr/0302/55 [서울대][새학생회] '민중해방의 불꽃'이라는 명칭을 이메일에 사용하는 서울대 총학생회 https://truthforum.kr/0302/59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페이스북
서울대 동문들이 시진핑 자료실 폐쇄촉구 기자회견을 진행합니다. CCP아웃, 공자학원실체알리기운동본부, 대안연대, 서울대 트루스포럼은 '시진팽자료실 폐쇄를 요구하는 서울대 동문 모임'을 구성하고 시진핑 자료실 폐쇄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합니다. 일시 : 2023.02.17(금), 오전11시 장소 : 서울대 본부 앞 당일 기자회견에서는 성명서와 함께 서울대 동문 200여명을 비롯해 1300여 분이 함께 해주신 "서울대 시진핑 자료실 폐쇄촉구 서울대인/국민 서명"을 본부에 전달할 예정입니다. 트루스포럼이 진행하고 있는 "서울대 시진핑 자료실 폐쇄촉구 서울대인/국민 서명"은 시진핑 자료실이 폐쇄될 때까지 계속 진행합니다. 뜻을 함께하시는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고 함께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서명하기 : 서울대 시진핑 자료실 폐쇄촉구 서울대인/국민 서명 ps. 기자회견 후에는 서울대 안의 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할 예정입니다. 점심 장소는 현장에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관련 포스팅 서울대 시진핑 자료실 공론화 촉구 기자회견/집회 성명서 및 사진 2022.10.19 https://www.truthforum.kr/notice/105 서울대 시진핑 자료실 폐쇄촉구 서울대인/국민 서명 https://www.truthforum.kr/notice/112
통일은 머지 않은 미래입니다. 소망을 품고 준비해 나아가야할 숙제이고,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한반도의 통일에는 여러 나라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떠한 통일이 될 것인지는 결국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준비된다면 통일은 결국 우리가 꿈꾸는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한반도의 자유통일을 기대하며 통일의 소망을 담은 글을 한 편 소개합니다. 연세대 트루스포럼 김의경 박사의 픽션입니다. 지금도 고통 받는 북한의 주민들과 북한 동포들의 해방을 향한 이승만 대통령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이 픽션이 현실이 되기를 바래봅니다. 통일로 가는 한반도 스케치: 북한편 2027년 10월 17일 청진 100미터 밖에서도 훤히 보일 정도로 엄청나게 큰 텔레비죤 같은 것이 청진 장마당에 들어섰다. 전국의 웬만한 장마당이나 기차역에 다 설치되었다는데, 전기가 부족하다나니(보니) 이동식 발전기도 함께 들어왔다. 남조선 텔레비죤 앞에는 넓고 푹신푹신한 고무 자리도 깔렸는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람들이 종일토록 가득 앉아 대형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남조선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선명한 화면을 통해 남조선과 세계 여러 나라를 보여주니 신기해서 쳐다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특히 중간중간 나오는 남조선 ‘광고’ 라는 것은 짧고 재미있다. 전에 숨어서 보던 남조선 드라마나 영화에는 배우들만 나왔다면, 요즘 장마당에서 보는 방송에는 일반 남조선 사람들이 나와서 뭘 먹고, 어떤 집에서 사는지, 일하는 곳은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준다. 남조선이 잘산다고 대충 짐작은 했지만 어떻게 잘 사는지 상상하기는 어려웠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고, 우리가 얼마나 낙후한지도 알 것 같다. 남조선 방송을 보니 길에 차가 너무 많아 저녁시간이면 도로에 빨간 불들이 빼곡하다. 전에 남조선 라디오방송에서 명절에 도로가 막힌다고 해서 무슨 뜻인가 했었는데 이제 보니 모두 사실이었던 것 같다. 더 신기한 것은 영화 속 배우가 아닌 일반 녀자들도 자기 차를 운전해 다닌다는 것이다. 남조선이나 서양에서는 녀자가 운전하는 것이 전혀 새롭거나 이상하지 않은 것 같다. 종일 남조선 방송을 틀어주니 우리는 앉아서 수십년간 못한 바깥 세상 공부를 한순간에 하는 느낌이다. 작년 12월초 장성한 아들 없이 장군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니 당중앙위원회가 급하게 장례식을 준비했고, 애도기간 후에는 비상회의로 계속 모인다고 하더니 올 봄부터는 서양 사람들이 국제련합(유엔)군과 함께 평양에 밀려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고심 끝에 중국이 아닌 미국의 도움을 받아 개혁개방으로 나가기로 했다는 소식이 로동신문에 등장한지 몇 개월 만이다.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던 미제 승냥이 원쑤(원수)들이 유엔의 이름으로 평양에 들어왔건만, 그리고 남조선 괴뢰들도 미군 뒤에 숨어 은근슬쩍 들어왔지만, 대형 화면을 통해 본 평양은 예나 지금이나 이름처럼 평화롭다. 유엔군이 최첨단 장비를 동원하고 당과 군의 안내를 받아 장군님이 숨겨놓은 핵무기와 생화학무기를 빠짐없이 찾았다는 소식도 남조선 방송에서 들려주었다. 밥 때가 되면 많은 이들이 대형 텔레비죤 앞에서 벤또(도시락)를 꺼내 먹고, 나처럼 집이 가까운 사람은 집에 가서 밥을 먹고 다시 나온다. 림시주민위원회에서 유엔 다국적군이 가져다준 쌀을 토요일마다 나눠주는데, 쌀알이 김정은 장군님 시절 장마당에서 사먹던 것보다 훨씬 크고 맛도 아주 달다. 이팝(쌀밥)이 뭐길래, 장군님 사망 후 남쪽으로 넘어가보려던 우리 동네 젊은이들은 집집마다 인원 수를 확인해 쌀을 배급한다는 말에 꼼짝없이 동네에 붙들려 있는 형국이다. (남조선 쪽에서 계속해서 국경을 봉쇄하고 있어 북쪽에서 남조선으로 넘어가기는 여전히 어려워 보인다). 수십년간 세분의 수령님이 그렇게 ‘이팝에 고기국’ 노래를 부르셨는데, 남조선과 미국 덕분에 인민들이 질 좋은 이팝을 이렇게 자주 먹게 된 것을 아신다면 뭐라 하실까. 쌀은 남조선에서 온 것 같은데, 쌀포대에는 ‘UN’ 이라고만 적혀 있다. 날이 서늘해지면서 따뜻한 옷과 담요도 청진항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담요는 북구라파(북유럽)나 카나다(캐나다) 등 좀 멀리 떨어진 유엔 회원국들이 보내주는 것이고, 옷가지는 남조선과 일본 등 가까운 곳에서 온다고 한다. 새 옷은 아니지만 특히 남조선에서 왔다는 겨울옷은 얼마나 따뜻한지 옷에 달린 털모자까지 푹 뒤집어쓰면 아직 가을이라 그런지 속에서 땀이 날 정도다. 남쪽은 뭐가 추워서 이렇게 두툼한 겨울옷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청진 기차역 앞에 고아원 건축이 시작됐다. 공사장 앞에 붙어 있는 ‘건축예상도’를 보면 내가 들어가 살고 싶을 만큼 깨끗하고 훌륭한 집이 될 것 같다. 고아원 건축 사업을 주도하는 조선인 교포들이 공사일꾼들에게 딸라(달러)를 준다는 소문이 돌면서 새벽부터 공사장 앞에 긴 줄이 생긴다. 공사장 관리인은 30년 전 고난의 행군 때 중국으로 뛰었다가(도망갔다가) 남조선까지 가서 대학도 졸업하고 이제 다시 청진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남조선 물이 좋은지 또래 동무들보다 10년은 젊고 하얀 얼굴을 하고 와서는 앞으로 다른 공사도 많을 거라며 일을 못 받아 어깨가 축 처진 사람들을 위로하며 돌려보냈다. 2028년 4월 17일 평양 오랜만에 평양 언니집에 왔다. 줄지어 만경대에 걸어 올라가 수령님, 아니 김일성 생가를 방문하고, 금수산기념궁전에 누워 있는 시신에게 허리 굽혀 천천히 절하던 때가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 많던 동상들도, 주체사상탑도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만수대 언덕배기에 있던 김일성, 김정일 동상은 너무 커서 소련 무너질 때처럼 밧줄로 쓰러뜨리지는 못했지만 성격 급한 사람들이 어디서 구했는지 폭탄을 가져다가 일찌감치 폭파시켜 버렸다. 세상이 뒤집히고 나니 동상이 서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눈물을 보이는 사람은 없고, 힐끗 보다가 침을 뱉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은 앞만 보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 버린다. 만수대 쌍동상 외에도 동네 입구마다 서있던 김일성, 김정일 동상과 석상, 김일성혁명사상연구실 석고상 등 그 일가의 형상을 한 조각상이나 그림은 전국에서 자취를 감추었는데, 그 수가 10만점을 훨씬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집집마다 붙어 있던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는 떼었다가 다시 붙인 집도 있는 것 같다. 남의 집을 제집 드나들 듯하던 인민반장들도 사라져 각 가정에 들어가 확인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선택은 각자의 몫이 아닐까? 오늘 낮에 탔던 전차에는 한 늙은이(할아버지)가 김일성 김정일 휘장(배지)을 달고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옆에 서있던 젊은이가 아직도 지겹게 그걸 달고 다니냐며 휘장을 낚아채는 바람에 늙은이 옷이 찢어지고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승객들은 모두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평양종합대학’으로 이름이 바뀐 김일성종합대학 기숙사에는 관리소(정치범수용소)에서 석방된 정치범들이 거의 여섯달째 가족과 함께 지내고 있다. 작년 가을 련합정부당국에서 정치범 32만명을 간략하게 조사한 후 석방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도립, 시립병원에 나눠져 신체검사를 받은 후 비교적 건강한 사람들 중 갈 곳 없는 사람들은 출신 지역 주요 대학 기숙사에 수용되었고, 질병이 있는 사람들은 정부 지정 병원에 수용되거나 국제적십자사 주선으로 미국, 구라파, 일본 등 선진국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게 되었다. 남조선 사람들에 비해 우리 북쪽 사람들은 대부분 10센티 이상 작고 마르고 볕에 그을러 얼굴도 검은데, 정치범들은 훨씬 더 못 먹고 혹사를 당해 평균적인 북조선 사람의 모습도 아니다. 그 중에서도 건강 상태가 나쁜 사람들만 골라 외국에 보냈으니 그곳 사람들이 그 정치범들의 몰골에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주택 부족이 심각해 대학 기숙사에 수용된 정치범들은 한동안 기숙사에 있을 것 같다. 김일성의 간부 양성소였던 김일성종합대학에서도 정치범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다니 김일성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 2029년 4월 17일 평양 1년만에 평양 언니집을 다시 찾았다. 대동강은 여전히 악취를 풍기면서도 유유히 흐르는데 대동강변에서 낚시하던 강태공들은 모두 사라졌다. 전시용으로 은퇴 당원들을 조직해 낚시꾼 흉내를 내게 했던 로동당이 사라졌으니 똥물에서 한가하게 낚시할 정신 나간 사람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매주 진행되던 조직생활총화도, 정치학습도 없어지고, 하루가 멀다 하고 불러내던 각종 로력동원도 사라지니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는데 시간이 가면서 불러주는 곳이 없어 조금 울적해지는 것은 혁명의 심장부였던 평양 사람들이 청진 사람들보다 몇 배는 더할 것이다. 언니는 군대간 둘째 조카가 휴가 나온다는 소식에 음식 장만하느라 분주하다. 작년 여름 조선인민군은 해산되었지만 제대한지 10년이 안된 제대군인이나 군대 해산으로 갑자기 집으로 돌아간 군인들은 원하면 누구나 공병 등으로 재입대가 가능해져 수십만명의 젊은이들이 련합정부군에 입대와 재입대를 하였다. ‘영실군’(영양실조군대)으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강도짓을 하던 군인들이, 이제는 잘 먹고 작은 봉급도 받고 운동도 많이 하니, 군대 가서 키가 몇 센티씩 자라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조중(북중)국경을 지키는 부대 외에는 대부분 도로 등 토목사업이나 농지 정리사업을 하게 되는데, 힘든 작업이지만 예전처럼 맨손, 맨몸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세계 각국에서 보내준 장비가 좋아 조카는 힘든 줄 모르고 군생활을 한다 했다. 또 원하는 사람은 저녁 시간에 남조선에 살다 온 ‘탈북인’ 전문가들로부터 남조선식 직업 교육도 받고 남쪽 얘기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리유(이유)야 어쨌든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자원 입대나 재입대가 인기이다. 2029년 10월 17일 청진 김일성은 80년대에 도로가 잘 갖춰진 동구라파를 다녀와서는 우리 조상들은 도로도 깔지 않았다며 선조들을 타박했다는데, 김일성도 부러워할 만한 도로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 같다. 1965년인가 남조선은 한일청구권협정이라는 것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받아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를 놓고 경제 발전을 시작했다고 남조선 텔레비죤에서 보았고, 그와 비슷하게 우리도 이번에 일본이 준 보상금으로 도로 공사를 시작하니 수령 시대에 일본과의 합의에 실패한 것은 하늘이 도운 일이었다. 우리 나라는 철도, 전기 시설 등 모든 기간시설이 너무 낙후하고, 일제강점기 때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아직도 고쳐가며 사용하는 곳도 많다. 그래도 오히려 심하게 낙후하니 아무 미련 없이 훌 밀어버리고 새로 시작할 수 있어서 오히려 잘된 것 같기도 하다. 남조선에 살던 탈북자 부부가 아기와 함께 청진에 돌아왔다. 젊은 남자는 ‘아기띠’라는 것을 리용(이용)해 아기를 몸에 붙여 안고 가고, 녀자는 가방 하나 들고 남자 옆에서 걸어가는데, 그 뒤로는 동네 아이들이 이 남녀와 아기띠 속에서 잠든 아기를 보려고 졸졸 따라간다. 북조선에서는 보통 남자는 저 멀리 담배를 물고 걸어가버리고 녀자는 아기를 업고 짐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남편을 따라가는데, 남조선 풍습이 우리와 다르기는 많이 다른 모양이다. 2030년 10월 17일 평양 작년까지만 해도 평양에는 유엔 평화유지군 외에도 국제원조기구 사람들, 외국 투자자, 그리고 각종 종교단체가 많이 들어와 있었는데, 전기도 자주 끊기고, 변소 등 불편한 생활 환경이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사업으로 돈 좀 벌어 보려던 투자자들은 못 버티고 거의 다 떠났고, 지금은 국제원조기구 사람들과 일부 기독교 선교사들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련합정부군의 공병대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도로공사를 시작했지만, 발전소나 상하수도 등의 기반 시설 건설은 더디게 진행되는 것 같다. 이동식 변소가 조금씩 늘고는 있지만 아침에 집을 나서면 하루 종일 손을 씻을 곳이 없는 평양에서 외국인들은 ‘물티슈’라는 하얀 물수건을 많이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련합정부가 유엔 감독하에 인민, 아니 ‘국민’의 대표를 뽑는 ‘의회선거’라는 것을 준비하고 있다. 로동당은 해산되었지만 련합정부에 많은 정보를 제공하며 도움을 준 사람들은 대부분 로동당원 출신들인데 이중 일부가 의회선거를 염두에 두고 최근 민주당을 만들었다. 또, 탈북해서 남한에 정착했던 부류 중 남한을 떠나 북쪽으로 돌아온 이들도 최근 자유국민당을 창당했다. 그래서 10월 25일 총선에서는 민주당과 자유국민당 후보들이 대결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선거를 한다고 여기저기 벽보가 붙고, 텔레비죤에서도 이런 저런 토론이 많이 나오지만 사람들은 선거보다는 좋은 직장 찾는 일에 관심이 훨씬 많아 보인다. 남조선 등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김정은 사망 이후 기본적인 식량이 공급되고는 있지만 남조선 방송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배를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평양외국어대학 출신인 우리 둘째 조카는 미국문화원에 통역으로 들어가 일을 하는데, 정치학습이나 조직생활이 없는데도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것을 보면 서양 사람들이 얼마나 무섭게 일하는지 알 것 같다. 남조선에서 파견 나온 상사만큼은 아니어도 조카의 딸라 월급은 남들의 두세배 가치는 되어서, 언니네 가족은 조카 월급으로 부식을 넉넉하게 사먹고도 여유가 있어 보인다. 언니네는 내가 평양에 올 때마다 반겨주고, 조카가 가져온 많은 신기한 미국 제품도 챙겨준다. 조카가 문화원에서 야근을 하는 날에는 숙소에서 ‘샤워’ 목욕을 할 수 있는데, 천장에 작은 구멍이 수십 개 뚫려 있고 그 구멍에서 따뜻한 물이 소나기처럼 나오면, 그 물로 씻는 샤워 목욕이 그렇게 따뜻하고 좋아서 조카는 야근 순번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모양이다. 10월 25일 선거는 민주당의 승리로 끝났다. 우선 자유국민당은 모든 지역구에 후보를 내지 못했고, 탈북해서 남조선에 살다가 온 자유국민당 후보들보다는 민주당 후보들이 년륜(연륜)이 있어 보여서인지 아니면 로동당에 대한 공포심이 아직 남아서인지 아무튼 민주당이 조금 더 인기가 있었다. 유엔과 련합정부는 의회에서 총리가 선출되고 정부가 구성되면 더 많은 권한을 새로운 정부에 넘길 예정이지만 그 이후에도 련합정부군은 유엔 평화유지군에 흡수되어 치안유지를 할 것 같다. 한편 문서대국이었던 수령시대 공화국 기밀문서 일부가 공개되면서 남조선이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남조선에 있으면서 비밀리에 로동당에 가입했거나 남한 가족 모르게 평양에서도 가정을 꾸리게 된 정치인, 종교인들의 이름과 배경 등이 언론을 통해 낱낱이 보도된 탓이다. 당사자들의 부인(否認)에도 불구하고, 많은 늙은 남자 정치인들이 부인(婦人)에게 소위 ‘황혼 이혼’이란 것을 당했다는 소식이 북한 장마당까지 파다하다. 김정일, 김정은이 남조선을 공갈 협박하려고 만든 핵무기라는 것은 알고 보니 조잡하기 짝이 없고, 대량 생산 근처에도 못간 영원한 실험용에 불과했다면, 남조선에 살면서 수령들에 협조하고 부역했던 남한 사람들의 명단 공개는 남한을 강타한 그야말로 핵폭탄이 된 것이다. 2031년 10월 17일 청진 의회는 개헌을 통해 국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북한공화국(Republic of North Korea)으로 바꾸었고, 이제는 누구라도 신청을 하면 려권(여권)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 취업비자로 남조선뿐 아니라 일본, 미국, 구라파로 갈 수 있는 길도 열리는 모양이다. 또, 유엔의 김일성반인륜범죄조사위원회와는 별개로 북한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김일성일가범죄조사위원회 설립에 대한 법도 곧 통과된다고 한다. 청진에도 많은 외국, 그리고 남조선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남조선에서 아직 국경봉쇄를 완전히 풀지는 않았지만 관광비자로 남조선 사람들도 북쪽에 올 수 있게 되면서 다양한 관광 상품이 생겨 평양뿐 아니라 지방에도 남한 려행객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남쪽 사람들에게는 ‘수령특각견학’이라는 것이 인기인데,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각각 사용했던 (이들은 부자간에도 별장을 공유하지 않았다고 한다) 별장을 둘러보고 각각의 수령들이 좋아했던 음식을 맛보는 려행 상품이다. 서양 사람들은 정치범수용소를 많이 찾는 편이다. 정치범으로 과거에 복역했던 사람들이 관광 지도원(투어 가이드)으로 과거 수용소 생활을 설명해주면 관광객들은 눈물과 콧물은 기본이고 구토까지 해가며 듣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대부분의 수용소 주변에는 시신 발굴 작업도 한창이다. 어떤 남한 사람이 말한 것처럼 수령시대에 북한 전체가 ‘거대한 시체안치소’가 되었으니 정치범 수용소 주변은 말할 것도 없다. 또다른 관광 상품은 리산가족 상봉 덕분에 만들어졌다. 남조선과 일본 정부와의 협력으로 리산가족들이 평양을 거쳐 고향을 방문해 이곳 가족들과 정해진 일정으로 2박 3일을 보내고 나면 추가적으로 북한 가족들과 함께 백두산이나 금강산 등 북한의 명산을 려행하는 상품이 많이 생겨난 것이다. 수령 시대에는 ‘관광’이라는 단어도 거의 쓰이지 않았고, 려행이란 것이 아주 드물었기 때문에 이런 관광 상품은 북한 사람들에게도 무척 인기가 있다. 그리고 말이 리산가족이지, 생존해 있는 1세대는 너무 고령이어서 가족 상봉은 주로 리산가족의 자녀 세대간에 이뤄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 자녀들은 서로 초면이어서 아무래도 어색함이 있는데, 려행을 통해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가까워지는 것이다. 깊은 산속 바위에까지 붉고 큰 글씨로 새겨 놓았던 수령 우상화 문구들도 남조선 기술 덕분에 모두 제거되어 리산가족들이 사진 찍을 맛이 날 것 같다. 외부 식량 원조로 사람들의 영양상태가 많이 좋아지고 있지만 학교는 회복이 더딘 편이다. 수령시대에 배우던 교과서는 과목과 상관없이 우상화 내용이 너무 많고 날조조작도 심각해 사용이 중단된 지 오래고, 학교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으면서 새로운 직장을 찾아 학교를 떠난 교사도 많기 때문이다. 남조선 각급학교에서 보내주는 교과서가 있지만 거기는 교과서 종류가 한 학년에 열 가지는 되어서, 남한 교과서는 도착하는 대로 창고에 차곡차곡 쌓이다가 어느 시점에 결국 변소 뒷일에, 또는 부뚜막 불쏘시개로 유용하게 사용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 실정에 맞는 새로운 교육과정 개발에 들어갔다고는 해도 교과서를 만들어 전국에 보급하고, 교원들도 새롭게 교육시키려면 시간이 좀더 걸릴 것이다. 북한 학교가 완전히 정상화되지 않고 있는 사이, 조선인 해외 교포들이 종교단체의 후원을 받아 시작한 영어학교가 대도시부터 생겨나 학생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청진에도 소학교 아이들을 위한 영어학교가 하나 생겼는데, 몸집이 큰 고등중학교 아이들까지 중간중간 끼어 앉아 영어를 배우고 있었다. 2034년 10월 17일 평양 평양의 분주소(경찰서)에서 남한 방문을 위한 려행비자 발급을 시작했다. 아직은 단체관광만 가능한데, 서울과 제주도가 가장 인기가 많고, 김일성 일가가 탐냈던 남해 한려수도 관광 상품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자기 동네를 벗어나지 못했던 수령시대를 떠올리며 ‘북한도 모르면서 한가하게 무슨 남한 타령이냐?’라고 말씀하시는 어른도 많다. 수령 통치 80여년간 뒤처진 것을 따라잡고, 남한 사람들 입에서 그 듣기 싫은 ‘값싼 노동력’ 소리 안 듣고, 언젠가 대등하게 앉아 조국통일 얘기도 하려면 놀러갈 시간이 있냐는 것이다. 그래도 젊은 세대들은 남한 관광도 하고, 그곳에서 배울 것은 배우면서 조금 여유를 가지고 가는 게 뭐가 나쁘냐며, 남한에 가서 찍은 사진들을 인터넷에 올리며 퍼나르기도 한다. 젊은 세대의 남한 려행이 못마땅한 어른들도 그 사진들은 열심히 들여다보신다. 4년만에 의회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사람들이 어느 후보에게 투표할지 선거 전에 물어보는 ‘여론조사’라는 것이 처음 실시되었는데, 이번 선거에는 자유국민당이 민주당을 이긴다는 결과가 나왔다. 소위 ‘샤이(shy) 자유국민당 지지자’들이 여론조사에서는 민주당 후보를 지지한다고 답변했을 수도 있어 탈북인 출신이 많은 자유국민당이 민주당을 크게 이길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어디서 날아왔을까? 청진에도 없는 참새가 평양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 언니와 형부도 평양에서 새를 본 것은 처음이라며 신기해한다. 외국 사람들이 키우던 고양이 몇 마리가 집을 탈출해 짝짓기에 성공했는지 가끔 길에 고양이 가족도 나타나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고양이가 나타난 것도 신기하지만 잡아먹히지 않는 것은 더 신기하다. 세상이 바뀌긴 바뀐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