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생명윤리연구소에서는 생명을 존중하고 태아를 살리는 'Stand up for Life(스탠드업포라이프)' 강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3기에서는 총 10명의 프로라이프빌더(pro-life builder)를 배출하였습니다. 스탠드업포라이프 3기 수강생들이 낙태에 찬성하는 프로초이스(pro-choice) 입장을 가진 '가상'의 친구에게 쓴 편지글을 더워드뉴스에서 연재합니다. 이번 순서는 낙태를 옹호하는 친구에게 쓰는 김희수(가명)님의 편지입니다.
나영아, 우리 참 오랜만에 만났지? 반가웠어.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낙태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지. 우리는 낙태에 대해서 서로 다른 입장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꽤 많은 시간 이야기했지만 끝까지 좁혀지지 않았던 것 같아.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너와 나눈 이야기가 떠나질 않는구나.
대화 내내 나는 ‘낙태’라고 했고, 너는 ‘임신중지’ 라고 하면서 사용하는 용어에서부터 둘 다 물러서지 않았지 ㅎㅎ. 어떤 시간들이 우리의 생각을 이토록 갈라놓았을까? 너는 내가 낙태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여성의 권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여성에게 죄책감을 주면서 억압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부장적 단어라고 했었지. 임신은 여성의 몸에서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에 임신의 유지와 중단은 전적인 여성의 권한이 되어야 한다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의 몸에 대한 억압에 관한 것은 나도 많은 부분 동의하기도 해.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가 네가 말한 그런 가부장 사회인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실생활에서는 오히려 여성 우선주의 가치관이 더 우세한 것 같은데...
내가 우리의 대화를 멈출 수 없는 것은 생존능력이 없는 태아는 여성의 몸의 한 부분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너의 기본 전제 때문인 것 같아. 생명에 대한 기본 전제가 다른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다시 물어보고 싶어. 생존능력이 인간을 결정짓는 기준이 된다면, 생존능력을 잃은 중증 장애인이나 말기암 환자, 노인들은 어떻게 봐야 하는 거지? 여성의 몸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하는 것이 기준이 되는 건가? 골백번을 생각해도 너무도 당연한 진실을 부정하려고 하니 계속 모순에 빠지는 악순환만 생가는 것 같아.
이 세상에는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절대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해. ‘인간의 생명’은 내가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너는 인간의 시작이 어디서 부터라고 생각하니? 수정된 순간부터 한 인간의 생명은 시작되는 것은 사실이지 않니? 네가 말한 임신의 유지/중단을 들었을 때, 전적으로 부양해야 하는 병든 가족에 대한 ‘돌봄 유지/중단’이 떠오르더구나. 나중에 내가 늙고 병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내 생명은 누구의 결정에 달려있게 되는 걸까? 우리 자녀가 너무 힘들어서(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도 있잖니) 돌봄 중단을 선택한다면 나는 죽임당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약하고 병들어 그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내 상황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결국엔 죄의 길로 빠뜨리는 것으로 내 인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을 잠시 상상해 보았어. 이런 게 지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구나.
나영아, 태아는 세상 가장 작고 약한 존재이지만, 그들의 생명을 무시하면 우리의 생명도 무시당하게 될 것 같지 않니? 인간이 다시 약한 존재로 늙고 병드는 것이 ‘생명은 평등하다’는 교훈이 되어 되돌아오는 것 같다.
이런 얘기 자꾸 해서 듣기 싫겠지만, ‘생명’에 관한 가치관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침묵하지 않고 집요하게 말하게 되는구나.
사랑하는 친구 나영이의 생명을 사랑하는 친구 희수가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더워드뉴스(THE WORD NEWS) = 김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