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이유 - 공산주의자들의 낯 뜨거운 민낯

레닌 정부, 일본과 밀약을 통해 한인 독립군의 처리를 약속
이동휘, 한인 무장 독립세력들의 자유시 집결 담당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이유

- 공산주의자들의 낯 뜨거운 민낯

 

레닌과 이동휘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은 한인 무장 독립세력을 와해시킨 자유시 참변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심지어 레닌 정부는 일본과 밀약을 통해 한인 독립군의 처리를 약속합니다. 이동휘는 한인 무장 독립세력들이 자유시로 집결하도록 선전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한인 독립군의 적군(Red Army) 편입을 약속했습니다. 자유시 참변에서 생존한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군들도 적군으로 편입된 후 대부분 강제전역과 무장해제를 당했습니다.

 

소련은 약소국 독립을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소련을 통해 독립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현실은 형식적인 독립국이었고, 소련에 예속된 국가였습니다. 민주집중제에 따라 철저하게 모스크바를 정점으로한 지휘체계를 따르게 됩니다. 이동휘나 홍범도가 독립을 향한 열망으로 순수하게 소련을 택했을런지는 모르지만, 그 결과는 잘해야 소련의 속국이었고, 이들은 소련의 국민으로 죽었습니다. (홍범도는 소련 국적 취득사실이 명백히 확인됩니다. 이동휘는 추가적인 확인이 필요합니다.)

 

 

아래에서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이유와 관련된 몇 가지 내용들을 정리합니다.

 

 

 

 

- 당시 소비에트 정권(볼셰비키 레닌 정부)과 일본의 국제정세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는 1919년 코민테른을 구성하고 약소국 무장독립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만일 볼세비키가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 일본과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러시아혁명으로 세워진 소비에트 정권의 적군(Red Army)과 이에 대항하는 백군(White Army) 사이에서 치열한 적백내전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비록 볼셰비키가 약소국 무장독립 지원을 약속했지만, 적백내전으로 국내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항일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지원은 사실 어려웠습니다. 또한 소련은 일본이 만일 백군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게 될 경우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한편, 당시 일본은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출병한 상황이 었습니다. 그리고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을 정리해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볼셰비키와 일본은 중국 베이징에서 캄차카반도 연안의 어업권 문제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면서 만주/연해주 일대 한인 독립군의 무장해제에 관한 밀약을 맺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흑하사변 참고)

 

일본은 백군 지원을 포기하고, 볼셰비키는 한인 독립군의 처리를 약속합니다. 한인 독립군을 적군 산하로 예속시키기 위해 자유시로 유인한 것은 이러한 밀약에 따른 레닌 정부의 계략이었습니다.

 

이런 배경에 대해서는 공산당에 가입한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 상해파 모두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1921년 6월 28일, 한인 독립군 세력은 자유시 참변을 통해 사실상 와해되는 수순을 밟게 되었습니다.

 

한편, 극동지역의 안정을 확보한 소비에트 정권은 1922년 12월 30일, 공식적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을 건국하게 됩니다.

 

 

- 한인 최초의 공산주의자 이동휘, 임시정부 공산화와 독립군의 적군(Red Army) 편입을 약속

 

1920년 홍범도, 김좌진 등이 이끈 항일 무장 독립군은 봉오동전투(6월)와 청산리전투(10월)에서 일본을 상태로 승리합니다. 다만 이것이 어느정도의 승리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10월 초~11월말까지 해당지역의 한인들을 학살했습니다.(경신참변) 이에 따라 항일 무장 독립군은 일본군 토벌대의 보복으로 활동 근거지를 다시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때 한인 최초의 공산주의자이로서 볼셰비키에 가입하고 레닌의 막대한 지원을 통해 한인 최초의 공산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1918년)한 이동휘는 각지에 흩어진 한인 독립군들이 자유시로 모일 것을 주장했습니다. 당시 그는 이미 레닌에게 임시정부의 공산화와 한인 무장 독립군의 적군 편입을 약속한 상태였습니다.

 

 

- 초기 한인 공산주의자들의 분열과 갈등 /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한인 최초의 공산주의자인 이동휘는 레닌의 지원을 받아 한인 최초의 공산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만듭니다. 그리고 1921년 고려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한편, 1920년 1월 22일 바이칼호 근처의 도시인 이르쿠츠크에서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고려부)가 조직됩니다. 그리고 이들 역시 1921년 고려공산당으로 개명했습니다.

 

보통 전자를 상해파 고려공산당, 후자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부릅니다. 이동휘가 레닌에게 약속받은 자금이 이르쿠츠크파에게 탈취당하는 등, 이들의 갈등은 초기부터 심각했습니다.

 



작성자 : 김은구, 202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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