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했던 신정통주의, 복음주의. 왜 이상해 지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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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과 본질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우리가 정리를 좀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 이성 절대주의, 합리주의, 이런 사조가 계몽주의와 함께 강화되면서 신학에도 이성을 강조하는 흐름이 들어오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자유주의 신학이 뭐냐? 성경 말씀을 인간의 이성과 감정, 경험을 바탕으로 재단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 같은 것들은 다 헛소리가 되는 거죠.
2. 내러티브 가스펠, 설화로 전락한 복음의 위험
결국 다 책 팔아먹으려고 만든 ‘내러티브 가스펠’이 되는 겁니다. 설화적인 복음, 말 그대로 이야기로 전락하는 거죠. 예를 들어, 동정녀 탄생? 말도 안 되는 거고.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 다 ‘구라’로 보는 거고. 십자가의 대속? 말도 안 되는 이야기고. 부활? 더더욱 말도 안 되는 거라는 겁니다.
3. 나치와 자유주의 신학의 관계
여러분, 독일에서 나치 정권이 창궐할 때, 당시 독일 신학계를 주도하던 신학이 바로 이 자유주의 신학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나치가 가톨릭 교회, 기독교인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나온 거다”라고 하시는데요, 히틀러는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어요. 나치의 세계관은 어떤 것이었냐면, 예를 들어 '토르' 아시죠? 천둥의 신. 이런 게르만 민족이 가진 신화적 상상, 요정 같은 요소들, 이 모든 것은 기독교와 배치되는 거였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게르만 남성성’을 거세했다는 불만이 있었거든요. 사랑, 자비 이런 걸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민족적 본성을 억눌렀다고 본 거죠.
이런 신화적 상상이 나치의 사상적 배경이 됩니다. 그래서 일부 교회가 나치에 부역한 건 사실이지만, “기독교가 타락해서 나치가 나왔다”는 식의 단정은 잘못된 겁니다. 명확하게 구별하셔야 합니다.
당시 독일 교회가 나치 정권의 등장을 방조했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신학을 지배하던 것이 바로 자유주의 신학이었습니다.
4. 경건주의의 한계와 침묵
신학이 힘을 잃으면 그렇게 됩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게 ‘경건주의’예요. 경건주의, 말은 좋지만, “난 경건하게 살래” 하면서 산으로 가버립니다.
목소리를 내야 할 크리스천들이 사라져버린 거죠. 그래서 신학이 건강해야 사회도 건강해질 수 있는 겁니다.
5. 진화론과 자유주의 신학의 연대
자유주의 신학은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의 이성과 감정, 경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재단합니다. 이건 분명히 잘못된 흐름이죠. 여기에 진화론까지 기승을 부리니까, 자유주의 신학은 “언제까지 신학이 과학을 배척할 거냐?”며 진화론까지 흡수하려고 듭니다.
6. 근본주의, 복음주의, 신정통주의의 등장
이런 흐름에 맞서 대항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미국에서는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로, 유럽에서는 ‘신정통주의’로 대응이 나타났습니다. 칼 바르트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죠.
7. 신정통주의의 문제와 칼 바르트 비판
그런데 문제는, 이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기 위해 등장한 신정통주의나 복음주의가 점점 자유주의 신학을 닮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신학교들에 퍼져 있는 문제가 바로 이거예요.
이걸 여러분들께서 직시하셔야 합니다. 칼 바르트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때 자유주의 신학이 주도하던 독일에서 초월적인 하나님, 계시의 우선성,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 체계를 구축했다”고요. 그런데 칼 바르트에 대해서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서는 기본적인 문제점들이 있다는 겁니다.
성경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고,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게 아니라, 개인이 받은 계시를 통해 말씀이 된다는 거죠.
이렇게 되면 계시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니 문제가 생깁니다. 또한, 칼 바르트는 ‘이중 예정’을 부정합니다. 이중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구원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예정하셨다는 교리인데, 이게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일 수 있지만, 성경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칼 바르트는 이 교리를 부정하면서 보편 구원에 대해 문을 열어둡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식의 주장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최후의 심판과 지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또 그는 부활의 역사성을 희석합니다. 이를 단순한 계시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성과 인간 경험을 전면 부정하면서, 오직 계시만을 강조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의 조명을 통한 인간 이성의 긍정적인 작용까지도 거의 다 부정해버리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이게 바로 개혁주의 입장에서 칼 바르트의 문제로 지적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문제는, 칼 바르트가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내가 믿으니까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주관적 실존주의를 주장했죠. 이런 주관주의적 실존주의를 칼 바르트도 기본적으로 수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방식은 “내가 믿으니까 부처도 존재한다”는 식으로 상대주의에 빠질 위험이 큽니다.
결국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기 위해 등장한 신정통주의가 다시 자유주의 신학에 문을 열어주게 되는 아이러니가 생긴 겁니다. 이게 지금 장로교가 처한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실존주의의 아버지라면, 그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빼버린 채 세속화된 실존주의를 만든 사람이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들입니다. “나의 실존이 곧 전부다”는 식이죠.
8.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구분
신정통주의는 지금 장로교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근본주의’, ‘복음주의’가 있었는데요, 저는 성경을 그대로 믿는 걸 근본주의라고 하면 근본주의자고, 복음을 체계적으로 전하는 걸 복음주의라고 한다면 복음주의자입니다.
하지만 이 둘을 구분하는 기준 중 하나는 신앙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입니다. 근본주의는 배타적이고 고립적인 경향이 있었고, 복음주의는 이성적, 학문적 접근, 대화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문제는, 복음주의가 그런 접근을 하다가 자유주의 신학에 다시 흡수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9. 프린스턴, 웨스트민스터, 풀러신학교의 흐름
역사를 보면 프린스턴 신학교, 이승만 대통령이 졸업하신 그 학교는 원래 장로교가 세운 보수적 신학교였는데, 1920년대 후반부터 자유주의 신학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를 비판하고자 1929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설립됩니다. 이 신학교도 시간이 지나면서 내부적으로 다양한 흐름으로 나뉘게 되는데, 메이천 교수의 제자들 사이에서 견해 차이가 생기면서 칼 맥킨타이어 같은 분은 더 강경한 근본주의 노선을 택해 독자 노선을 걷게 됩니다.
1947년에는 웨스트민스터에서 플러신학교가 갈라져 나오는데요, “웨스트민스터는 너무 경직돼 있다”는 이유로 오켄카 같은 인물이풀러신학교를 세웁니다.
10. WEA와 트루스포럼의 입장
이후 이 흐름은 신복음주의, 포스트 이반젤리컬리즘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전국 복음주의협의회를 만들고, 세계적으로는 WEA(세계복음연맹)라는 이름으로 확장됩니다.
이런 배경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예를 들어 오정현 목사님이 WEA와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로 공격받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트루스포럼은 근본주의적 색채를 가진 조영엽 박사님 같은 분도 초청했고, 김상복 목사님처럼 WEA 한국 대표를 하셨던 분도 트루스포럼을 지지해 주십니다.
저는 신학교 다닐 때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 영향으로 힘든 시간도 겪었습니다. 그러던 중 극동방송에서 김상복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점을 분명히 정리하고 선을 긋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WEA 회장 했던 사람이 트루스포럼이랑 어울려도 되냐?”며 비판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 지혜롭게 접근해야 합니다.
11. 복음주의 내부 개혁의 필요성
복음주의 진영 안에 좌경화된 흐름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잘못된 건 아닙니다. 그 안에서 개혁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 흐름을 바로잡아야죠.
12. 로잔대회와 보수 진영의 개입
로잔대회에서도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이번 한국대회에서는 동성애 문제 등에서 분명한 입장을 세우는 등 많은 것들이 바로잡혔습니다. 그건 소위 ‘근본주의자’들이 믿음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이분들이 “로잔은 타락했어”라며 선만 그었더라면, 그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13. 결론: 복음주의의 방향과 경계
중요한 건, 복음주의가 학문과 지성을 강조하다가 자유주의 신학과 가까워지는 흐름이 분명히 있다는 것, 그걸 우리가 인식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