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민족주의자”라는 김일성과 마오쩌둥의 신화
로렌스 펙 | 2025년 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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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은 양국에서 근대적인 민족의식을 크게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은 조선과 중국 모두에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이 퍼지게 만든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민족주의 정서를 교묘하게 활용해 이상주의적인 젊은이들을 끌어들였습니다. 비록 3.1운동과 5.4운동이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는 '부르주아 운동'에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이를 민족 해방 투쟁으로 포장했습니다.
결국 많은 젊은 애국자들이 공산주의를 민족 독립의 수단으로 착각했고, 이것은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애국심을 내세우며 청년들을 선동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민족주의를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중국과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은 민족주의를 겉으로 내세우면서도, 실상은 외래 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충실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흐름은 중국 공산당, 북한 노동당, 그리고 대한민국 내 친북 세력의 과장된 민족주의 선전 속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좌파 성향의 역사학자들과 언론인, 평론가들은 김일성과 마오쩌둥 같은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본질적으로 민족주의자’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이들은 공산주의는 단지 도구였고, 이들의 진짜 목표는 민족 독립이었다는 식의 주장을 반복하며 왜곡된 인식을 확산시켰습니다.
하지만 최근 다양한 국가 기록들이 공개되면서, 이러한 신화는 강하게 도전받고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 연구들은 중국과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과 지도자들이 실상은 진정한 민족주의자들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기 공산주의 운동은 소련의 직접적인 자금 지원과 조직, 외국 공산주의자들의 개입 속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초기 단계에서 이들은 모스크바에 있는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했으며, 그 과정에서 자국의 이익은 물론 동료 공산주의자들마저 배신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1929년 소련이 중국을 공격했던 동청철도 사태에서 중국 공산당은 소련의 침략을 비판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지지했습니다. 조선에서는 1921년 자유시 참변 당시, 소련의 명령에 따라 조선공산당이 독립군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무장으로 소련을 수호하자"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자, 스탈린은 한인과 중국인을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대량 학살과 강제이주를 시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충성스러운 공산당원들마저 처형되거나 수용소에 보내졌고, 이러한 숙청에 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도 협조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AB단 사건이라 불리는 내부 숙청이 벌어졌고, 조선에서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공산당 내부에서 '민생단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동지들이 살해당했습니다. 일부 좌파 학자들은 김일성이 숙청을 막으려 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오히려 숙청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가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책임을 시사합니다.
또한 북한의 공식 기록과는 달리, 김일성은 만주에서 ‘독립적인’ 조선공산군을 이끌었던 것이 아니라, 철저히 중국공산당의 지휘 아래에 있었습니다. CCP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으며, 그의 활동 역시 코민테른의 노선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최근 연구들은 마오쩌둥 역시 CCP 거점이었던 옌안 시기 동안 소련의 정책에 철저히 순응하고 있었음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나치 독일과 소련이 손을 잡았던 시기, CCP는 서방을 제국주의자로 몰아붙이며 독소 불가침조약을 지지했고, 1941년에는 일본과의 불가침조약도 공개적으로 찬성했습니다. 이처럼 이들은 자국의 이익보다 소련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이익을 우선시했습니다.
김일성과 그가 이끌던 부대는 1940년 말 무렵 만주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중단하고 소련으로 도피했습니다. 당시에는 단순히 일본군의 압박 때문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사실상 소련-일본 간의 외교적 협상을 염두에 둔 움직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한편 CCP와 일부 서방 좌파 학자들은 마치 중국공산당이 항일 전쟁의 주역이었다는 식으로 왜곡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주력으로 싸웠으며, CCP는 후방에서 제한적으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심지어 마오의 공산군이 일본군과 협력했던 정황도 다수 밝혀지고 있습니다.
북한과 좌파 역사학자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친일파들과 협력했다며 비난하지만, 사실 김일성 정권의 내각에도 다수의 친일 협력자가 있었던 사실은 국내 연구를 통해 이미 확인된 바 있습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이 일으킨 남침 전쟁은 그가 '진정한 애국자'였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결정적 사건입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 같은 민족에게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1960년대 마오와 소련 간의 충돌, 김일성과 중소 양국 간의 마찰 역시 단순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권력 장악을 위한 정치적·이념적 갈등이었습니다. 마오는 스탈린 이후 공산권의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고, 김일성은 내부의 친소·친중 세력을 제거하면서 개인 권력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결국 김일성을 '진정한 민족주의자'로 포장하는 주장은 단지 역사 해석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198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극좌 성향 세력, 특히 '민족해방(NL)' 계열은 반미·반일 감정을 이용해 김일성과 북한 정권을 ‘진짜 민족의 계승자’로 미화해 왔습니다. 이들은 대한민국을 '미국의 괴뢰국'이라 규정하고, 북한을 ‘순수한 민족 국가’로 떠받듭니다.
이러한 왜곡된 사고방식은 실제 정치 현실에서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과거 이석기의 통합진보당, 그리고 현재의 진보당은 NL 세력의 정치적 전진기지로 기능해왔습니다. 문재인, 이재명 전·현직 정치인들이 이들을 민주당 내부로 끌어들였고, 비례대표와 국회의원 후보로 추천하거나 고위직에 임명하는 방식으로 협력해왔습니다.
최근 선거에서는 아예 진보당과 공식적인 '연합전선'을 추진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흐름은 대한민국의 미래는 물론, 한미동맹에도 매우 심각한 위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