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호] 한국경제 50년의 뒤안길 -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보이지 않는 손>의 김인호입니다.
오늘은 한국 경제의 뒤안길, 다음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제 이야기만 너무 하면 여러분들이 재미없을 것 같아서, 오늘 저(한국 경제의 뒤안길) 제목을 갖다가 제가 모셨던 역대 대통령들을 경제적인 관점에서

 

또 특히 시장 경제적인 관점에서 한번, 주제는 없지만 평가를 좀 할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분들이 한 이야기를 전부, 또는 경제 정책에 중요한 걸 다 알리려고 한다면 이것만 가지고 채널 전체를 구성해도 모자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주 요약해서 말씀드리려고 하고

 

이승만 대통령부터 마지막 박근혜 대통령 압박까지. 물론 그 사이에 제가 직접 정부에 있으면서 같이 일하지 않은 노무현 대통령 혹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말할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빼려고 생각합니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을 말씀드리려고 하니까 조금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제가 4.19 혁명이 났을 때 대학교 1학년생이었어요.

 

그리고 제가 4.19혁명에 직접 참여를 의거에 직접 참여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청와대 그 당시 경무대라고 불리우는 효자동에 제일 경무대에 가까운 그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는 데까지 데모를 하러 갔었고, 그때 저희가 거기서 데모를 할 때 처음으로 발포가 이루어졌고,

 

제 옆에 있던 우리 대학 동기 고등학교까지 동기인 아주 참 훌륭한 좋은 친구였던 친구 한 친구 총에 맞아 죽었고, 이러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사실은 제가 젊었을 때는 그렇게 좋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그 당시에 그보다 더 어릴 때 어떤 이야기를 들었느냐. 어른들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승만 대통령은 외교에는 귀신이고 내정에는 등신이다.
외교는 잘하는데 내치를 잘 못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했어요.
저도 그렇게 듣고 컸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는데.

 

제가 이제 정말 경제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을 하게 되고, 경제를 깊이 있게 생각하면 과거를 뒤져볼 수밖에 없어요.
과거를 모르는 현재라는 건 있을 수 없고, 현재의 위치를 확인 안 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제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알고 있던 게 너무나 잘못 알고 있던 것이 많고 너무나 단편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구나(하고 생각하게 됐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외교만 잘한 게 아니에요.
그 양반이 만든 게 이 한미 동맹. 이게 뭐 좌익 사람들 혹은 북한

 

혹은 중국에서는 뭐 이걸 통해가지고 미국이 한국을 지배한다 한국 남한이 미국의 식민지다 어쩐다 이야기하지만, 한미 동맹이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됐겠는가. 더 나아가서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동북아 전체가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기 시작한 날부터 전쟁이 없었어요.
이 화약고 같은 동북아의 칠십년 가까운 기간 동안에 전쟁이 없었다.
이것이 오늘의 동북아가 특히 중국이,

 

그리고 한국이 그리고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우뚝 선 경제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심지어 중국조차도, 미군이 존재했기 때문에 전쟁이 안 났다 하는 사실에 대해서 인정할 겁니다.
나는 이호 목사라는 분이 이 와 같은 내용을 어느 책에 쓴 걸 보면서

 

이건 참 대단한 생각이다. 한미동맹 때문에 한국이 발전했다는 건 내가 알고 있었지만 동북아 전체가 한미동맹에 영향을 더 걸 봤다.
이거는 특결이다. 이렇게 제가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순수히 경제적인 시각에서 얘기합시다.
정치적으로는 그분의 공과가 너무 많은데 경제적인 시각에서 보면 우선 이 헌법 자유시장 경제의 원칙을 천명했다는 것. 그 당시에 우리나라 사람들 남한 사람들의 약 70%가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에 자유시장경제의 원칙을 천명한 것.

 

이 헌법은 이승만 박사가 사실상 승인함으로써 이루어진 헌법입니다.
우리나라 초대 제헌 때 만들어진 헌법. 농지개혁 이 어려운 일을 해냈어요.

 

만약에 농지 개혁을 안 했더라면 6 25 때 우리나라는 완전히 공산화됐을 겁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특히 농민들이 다 정부를 지원하고, 인민군 북한에 반기를 들 수 있었던 것은 이 농지 개혁의 덕분이었다.
의무 교육을 실시한 것.

 

그럼으로써 한국민들의 지적 수준을 갖다가 높여서 문화 국가로 가야 되겠다.
세계 1등 국가로 가야 되겠다고 하는 발판을 놓은 것. 특히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이 원자력에 관한 겁니다.
1950년대 대한민국 1인당 국민소득이 100불도 안 되던 그 시절에

 

이승만 대통령이 원자력에 문제에 눈을 떴단 말이에요.
19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계기로 여러 가지 과학기술을 미국으로부터 도입하게 되는데, 그 일환으로서 1956년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한미 협정을 체결했어요.

 

지금 보면 웃기는 양이 아니에요. 그 아무것도 없는 한국 약불도 안 되는 소들을 가진 나라 한국이 그때 이미 원자력 협정을 미국과 체결했다.
누가 주도했냐 이승만 대통령이 주도한 겁니다.
그 직후에 문교부에 원자력과를 설치했어요.
백 명에 가까운 원자력 연구소를 미국에 파견했습니다.

 

1958년에 국제원자력기구, 많이 나오죠 IAEA(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북한이 탈퇴했다고 하는 이 IAEA에 우리가 가입을 했습니다. 처음 1959년에 원자력연구소를 설치해가지고 거기에 원자로를 설치했단 말이에요.
1959년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원자력공학과가 처음으로 신설되었습니다.
저는 1960년에 대학에 들어갔는데요.
제가 대학 들어가기 그 전에 저보다 한 1기 앞선 원자력공학과가 이미 생겼다.
저는 이러한 기록을 새삼스럽게 보면서, 이분이 가졌던 해안 미래를 내다보는 그 탁월한 예지력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 형편입니까. 이렇게 해서 만들어놓은, 그래서 1960년도부터 지금 약 60년에 걸쳐서 이 60여 년 약 70년에 가까워 해서 세계 최고의 원자력 기술 국가가 돼 있는 대한민국입니다. 한국의 원자력,

 

제가 (구체적인) 넘버를 잊어 버렸습니다마는, 한국형 원자력이 개발돼서 미국조차도 이것을 인정한 (경우입니다). 미국이 미국 밖의 원자력을 인정한 유일한 케이스인 이 정도의 기술력을 쌓은 대한민국의 원자력을 갖다가, 지금 다 폐기하고 줄이고 내버리겠다.

 

저는 이걸 국가적 자살 행위다 이렇게 부르는데 지금 이 정부는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생각하면서, (또) 오늘의 우리나라를 보면서 참 참담한 생각을 - 특히 원자력 이 부분에 대한 참담한 생각을 - 금할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 이분의 경제적 업적(에 대한 이야기).
설사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혁명을 일으켜서 집권을 한 그 과정, 또는 집권을 하고 정국을 운영해가는 과정에 있었던 독재, 이런 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

 

한국의 야당들은 결국 박정희 대통령 정부와의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이겨서 결국 집권해 문민정부로 넘어가게 되는 그런 길을 닦게 되는데,

 

그런 사람들조차도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에 대해서 기여한 역할 공로를 인정하는 데는 그렇게 인색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그 분이 뭘 했다. 뭐 했다는 걸 다 알기 때문에 제가 말씀드릴 필요 없고 제가 시장주의적인 입장에서 볼 때 박정희 대통령, 오늘날 제가 생각하는 의미의 시장주의자는 결코 아니었어. 그러나 그분은 시장을 이해하는 분이었어요.
특히 시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업의 생리. 기업이 어떻게 뛰느냐 움직였느냐

 

기업의 이윤 동기, 기업은 이윤를 추구하는 주체다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인식. 두 번째, 군인들이 정권을 잡았는데 경제는 군인들 힘만 가지곤 안 돼. 전문가 전문 관료들의 도움을 정부 안에서는 받아야 되지만, 정부 바깥에서는 기업하고 같이 똘똘 뭉쳐서 이 경제를

 

부흥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돼. 저는 이걸 가지고 <한국 주식회사의 신사>다 이렇게 작명을 했습니다.
이건 제가 붙인 이름입니다. '한국 주식회사의 신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란 말이죠.
그래서 이 기업들이 그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 집권했을 때, 다 잡혀가는 걸로 생각하고 다 숨어버리고 뭐 정부하고 어떻게 해야 될까 길을 헤매고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이병철 회장을 비롯해서 주요 기업인들 불러서, 당신들 과거 다 불문에 붙일 테니까 앞으로 나하고 같이 한국 경제를 일으키는데 힘을 합치자. 기업에 대한 일정한 이윤을 추구하는 걸 인정해주겠다.
그래서 한국경제가 발동이 끌리기 시작한 거다 말이죠.

 

특히 이분은 우리가 무역을 앞으로 해야 된다. 무역의 중요성을 이해했던 분입니다.
우리나라 한국무역협회가 있지 않습니까. 삼성동에 가면 큰 건물, 무역 타워 트레이드 타워(한국종합무역센터)라고 하는 이렇게 생긴 건물이 있죠.
코엑스가 있고, 거기 백화점이 있고 호텔이 있고 뭐 공항 터미널이 있고, 그 방대한 무역센터가 다 무역협회에 (있죠).

 

재산 기본조조산이고 활동 기반인데 이 무역협회가 언제 만들어졌는가? 제가 29대 한국무역협회 회장을 3년 임기 채 못 채우고 나왔습니다만, 3년 가까이 한 사람입니다.

 

저도 무역협회가 글쎄 뭐 박정희 대통령 집권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건 분명하지만 한 50년대 언저리 어디에 만들어졌지 않겠느냐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회장이 되고 나서 역사를 알아보니까 1946년에 설립이 됐어요.
우리나라 정부가 언제 설립됐습니까 1948년에 설립이 됐단 말이죠.
정부가 설립되기 이전에

 

한국의 무역협회가 (말이죠). 아무것도 없는 무역선 통통선 하나 겨우 오징어 몇 마리 잡아다 파는 것이 무역 수출 품목의 전부이던 시절에, 한국이 장내에 볼 때 자원이 없는 나라가 무역을 통하지 않으면 경제를 일으켜갈 수 없다라고 하는 생각을 가졌던

 

선각자 105인이 모여서 만든 협회가 오늘의 무역 협회입니다. 삼성동에 있는 방대한 기구와 자산을 가지고 있고 한국 무역의 민간을 대표하고 있는 그런데 이 그 무역협회를 실질적으로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하고 2대 때부터 무려 17년간 회장을 한 분이 있습니다.
이활이라고 하는 분인데 이분이 우리가 해서 참 잊을 수가 없는 분이에요.
근데 이분이 516이 나자 과감하게 박정희 대통령한테 면담을 신청해서

 

박 대통령을 찾아(갔습니다). 그 당시 박정희 장군을 만난다는 건 참 굉장히 어려운 일일 뿐더러 잘못하면 굉장히 위험한 일일 수도 있는 거죠. 특히 경제인의 입장에서는 스스로 찾아가서 한국 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한국은 앞으로 무역을 통해서 경제를 부흥시켜야 한다 하는 점을 강조하고, 박 대통령이 거기에 동의하고 당신 말이 옳다. 그렇게 하자 그렇게 해서 한국이 무역 입국의 기치를

 

내걸게 됐단 말이죠. 물론 그 뒤에는 이것이 보다 더 큰 대외 개방 국제화 국제 소위 글로벌 스탠다의 어떤 수용 이런 더 고상한 정책으로 바뀌어 갑니다마는, 저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에 대한 안목 특히 시장에 대한 이해 그것은 참 그 당시 기준으로서는 참 놀라울 만한 일이다.

 

2차 대전 이후에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나라들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그 나라 중에 어떤 나라도 시장 경제를 채택한 나라가 거의 없어요.
다 정부가 군사 정부가 독재적으로 혼자서 경제를 다 운영하겠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어디로 가겠습니까. 사회주의 경제 체제로 흐를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해서 경제 다 말아먹고

 

다 국민을 도탄에 빠뜨리고. 그러고 나서 또 혁명이 일어나서 정권을 빼앗기면 또 새로 집권한 사람은 또 그 전체를 바로 밟고. 오늘날 베네주엘라나 남미의 여러 나라들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게 세계의 일반적 패턴이에요.
이 독재자들이라는 건 국민을 잘 살게 만들면 안 된다는 생각을 속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어떻게 피시(낚시)할지 몰라도 왜 국민이 잘 살게 되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추구하겠습니까. 먹을 만하면 다음에는 자유를 추구하게 돼 있고, 민주주의를 찾게 되어 있고, 국민의 기본적 권한이

 

어쨌더니 하고 나오게 돼 있기 때문에, 골치 아프고 위험하다. '국민을 다 가난하게 만들어서 결과적으로 국가에 의존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내가 장기 집권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 독재자들의 일반적 사고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박정희 대통령이 10.26을 맞아가지고 물론 부하의 손에

 

돌아가셨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시기 이전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경제적 성과 때문에, 이제 먹는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자유를 추구하는 국민들의 저항이 지기 시작했던 거란 말이죠.
그래서 이것이 이제 점점점점 가열되던 시기

 

10.26 이 생겨가지고 박 대통령은 저 세상으로 갔단 말이죠.
어떤 의미에서 저는 '박 대통령은 그분이 스스로 이룩한 성공, 특히 그 경제적 성공에 의해가지고 성공 때문에 그 희생물이 된 것이다' 라고 생각해도 틀린 말이 아니지 않겠는가 -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때는 제가 사무관, 또 과장 한 중참 때 정도까지만 박정희 대통령 정부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사실상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쳐다보면서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는 그런 기회는 없었어요.

 

사실 그럴 수 있는 기회는 그다음 전두환 대통령 물론 그 사이에 최규하 대통령이 잠깐 있었지만, 그분은 언급할 필요가 없고. 전두환 대통령의 집권한 이후에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쳐다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가) 있게 되는데, 그 이야기는

 

상당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 다음 기회로 미룰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고, 다음 번에 전두환 대통령 이후의 대통령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상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이지 않는 손'의 김인호였습니다.

 

 

 

 

(트루스포럼 = 윤찬호 기자)

찬성 반대
찬성
2명
100%
반대
0명
0%

총 2명 참여